UPDATED. 2022-11-30 16:22 (수)
남인의 누항담론 / 곡선화는 가장 한국적이다
남인의 누항담론 / 곡선화는 가장 한국적이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11.03 13: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장 진도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이며 세계적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진도 강강술래와 진도아리랑, 소포걸군농악 등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문화에서 로컬 푸드로 예술로 승화시켜야 한다. 진도사람들은 천상적으로 노는 것을 즐겼다. 죽음의 길 에서도 춤과 노래가 있었다.놀이는 신명을 불러내 살아있는 자들에게 슬픔과 원망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은하수를 보라. 우주는 곡선으로 이뤄졌다. 지구 또한 당연히 그 형태가 원형이며 모든 삶에 곡선화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

곡선화는 미래적이며 가장 한국적이다. 한국의 전통 의식주 생활에는 가장 자연 친화적으로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한다. 한옥의 지붕을 보라. 중국과 일본의 사찰이나 가옥과 비교해보라. 궁전 지붕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의 옷차림 또한 우아한 한복의 멋은 곡선에서 은은히 그 품위와 격조를 더한다.

한국 민요는 그 원형의 가락이 곡선형이다. 세계문화유산인 한국아리랑이나 그 대표인 진도아리랑과 강강술래는 원과 곡선의 극치의 예술성을 내보인다.

진도를 한 작가는 ‘원형의 섬’이라고 했다. 이는 진도의 문화, 자연, 이곳에 사는 인간의 품성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이라고 볼 수 있다.

진도가 자랑하는 남도수묵화는 곡선의 향연이다. 수많은 섬과 산과 들, 밭두렁과 동네 안길 돌담길이 하나씩 사라진다. 진도는 다시 곡선을 찾아야 한다.음악과 미술에서, 농업에서 바다에서 결국은 인가의 심성에서 되살려내야 할 것이 바로 곡선의 철학이다.

그러나 진도와 한국은 근 현대화로 들어서면서 원형과 곡선을 많이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직선화와 체적 중심의 사각형과 직선의 시대를 달려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세계에서 자살률이 1위이며 출산율이 OECD에서 최저인 것에 대해 ‘대한민국은 한강에서 기적을 얻고 기쁨을 잃어버렸다’고 한탄하였다. 진도는 거의 모든 개펄을 매립하였다. 배들이와 닻바위, 닻머리들은 황금들판이 되었다. 철새들은 떠나가고 물고기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사람들도 고향을 떠나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원형은 굴곡이다. 우리는 다시 원형과 곡선을 찾아야 한다. ‘올라갈 때 보이지 않았던 것 내려올 때 보았다’고 시인은 꽃을 노래했다.

진도는 섬이다. 바다가 어머니다. 속도에 지친 현대 도시인들이 슬로우 시티를 찾는다. 진도는 최근 해안 일주도로가 완성되었다. 버스비도 무료화했다.

그러나 그렇게 갈망하던 포산~팽목항 직선화 4차선은 요원하기만 하다. 서울식 아류와 획일화는 진도를 3류사회로 전락시킨다. 아무런 메리트도 경쟁력도 없다. 다시 천년의 유배지로 되돌아가는 듯 인구는 줄어들고 고령화는 전국 수위를 다툰다.

장구를 보라. 북놀이를 보라. 명절과 풍속이 사라진 사회는 수입산 헬로원이 판을 치며 마침내 수많은 청소년들을 ‘[죽음의 굿판’ 아비규환으로 몰아붙였다.

불교와 민속에서 회향하는 의례는 통상적으로 많은 수, 우주의 법칙, 강력한 힘, 제어력, 성취, 사랑과 우정, 창조적인 사고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원과 만다라의 형태도 여기에 토대를 두기도 했다. 진도의 씻김굿과 다시래기는 온통 곡선의 의례로 가득하다. 시간의 원림을 거니는 구음소리들. 맺히고 접혔다 삶의 고(苦)가 풀리고 길을 닦는다. 순환논리가 새로운 농업의 활로가 되고 있다.

인도 고전 신화에 의하면 아쉬타바크라 아사나는 미틸라 왕 자나카의 영적 스승인 성자 아쉬타바크라에게 헌정되었다. 그 성자가 어머니에게 잉태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까골라는 베다를 낭송하면서 몇 가지 실수를 했다. 이것을 듣고 태내에 있던 성자는 비웃었다. 그의 아버지는 화가 나서 그의 아들이 장애인으로 태어나도록 저주를 내린다.

그는 8자로 뒤틀린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고 그 형상대로 아쉬타바크라라고 이름 지어지게 되었다. 후일 아쉬타바크라가 자나카 왕의 영적 스승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축복을 내렸으며, 그러자 순간 그의 불편하게 구부러진 몸이 다 펴졌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구부러짐은 곡선(曲線)이다. 흔히 한국적 아름다움을 ‘곡선의 미(美)’라 일컫는다. 곡선의 미는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자연 친화적인 아름다움이다. 길도, 건물도, 강도 상대나 대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나 대상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길이 흐르다 막히면 돌아서 간다. 강물도 흐르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한다.

직선은 경계를 나누지만, 곡선은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래서 곡선은 공존과 관용을 상징한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만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담은 우리의 곡선은 일명 ‘사랑의 미(美)’라고 할 수 있다.

산의 부드러운 능선과 쉼 없이 흐르는 강물, 그 강물이 모이는 바다의 해변, 그리고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풍만한 여체의 공통점은 역시 곡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중 직선을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직선은 대부분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물일 것이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우리가 곡선을 보면 이질감을 느끼고 긴장을 풀게 되는 것은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마주하면서 내면으로부터 친밀감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고요함 속에서 흐름을 보고 흐름 속에서 고요함을 보는 그런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진도의 정책문화는 이제 곡선화로 시작되어야 한다. 진도학회도 진도문화원, 예총 진도지부, 농어민단체, 무형문화재전수관과 수 많은 민속보존회, 보물같은 마을전수관 향토문화유산 무엇보다 진도군청 공직자들의 의식 유연한 곡선화의 탄력성을 가져야 한다.

쌍계사
소치선생 사적비

운림산방이란 첨찰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조석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림산방은 늦은 석양보다 이른 아침에 그 운치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다. 특히 봄비가 내린 뒤 희미한 운해 속에 드러나는 풍광을 바 라볼 때 멀리서 판소리 장단과 빠른 자진모리의 장단이 운 무와 어우러질 수 있다면 선율을 타고 오는, 짙푸른 녹엽매향錄葉梅香을 가슴과 눈으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림산방 ‘운림각雲林閣’에 뚝뚝 떨어 지는 붉은 산다화는, 대숲과 교차되며 소치의 그 림세계로 흐르게 하고, 안개 속 일지매는 차향과 묵향이 어우러져 시나위 구음소리 정취를 느끼게 한다. 소치는 단잠에서 깨어 일어나면 솔가지를 모아 차를 달여 마셨고, 옛 성현들의 글과 시를 읽으며 지난 세월을 풍미했다. “오직 독서를 사랑하되 고기古器도 아울러 하며 또 문자를 가지고서 보리에 든다 다섯 이랑은 대를 심고 다섯 이랑은 채소 갈고 한나절은 좌선하고 한 나절은 글을 읽고” 이렇듯 소치 허련은 차를 마시며, 고기古器를 통해 미를 추구하고, 대를 심고 가꾸는 일들을 일상시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 이전까지의 차문화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88-1715) 시대를 지나며 사실적인 풍속화와 진경산수의 화풍들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추사와 다산, 일지암의 초의선사, 운림산방의 소치 허련 등이 만나 한양의 신문화와 남도의 토속적인 느리고 더딘 유배문화가 어우러져 새로운 차문화로 꽃 피 는 계기를 마련했다. 실제로 차문화는 실학사상과 더불어 영·정조시기에 이르러 남도 차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소치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스승 추사에게 초의선사의 정성이 담긴 차를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세 차례나 바닷길을 건넜다. 추사는 유배기간 동안에도 소치에게 명사들과 인연을 맺게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후기의 무신이며 군사전략가이자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1810~1888)라 할 수 있다. 소치는 신관호와의 인연을 통해 영의정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을 만나게 되었다. 소치는 1856년, 그의 스승 추사가 일흔 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심정을 담은 글을 통해 스승 추사를 잃은 슬픔을 표현하였다.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되어 보기도 하고 불법에 귀의하여 부용을 잡기도 하였으나 내 스스로 돌아보며 쓸쓸히 웃으며 오로지 그림만 그렸도다. 세 번 바다로 들어갈 때 세상은 망망했으나 예는 하늘에 통하도다. ……– 《소치문집》 중 그리고 10년 후인 1866년, 일지암의 초의선사마저 입적하게 되자 소치는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 되던 1859년, 고향 진도로 낙향해 운림산방을 짓고 명사들과 교류하며 그가 스스로 지은 《소치실록小痴實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스승인 추사와 초의의 곁으로 떠났다. “호탕한 신세는 갈매기가 무리를 찾아 들듯하고 속세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은 사슴이 무리를 떠남과 같습니다. 매실의 신맛, 황백의 쓴맛도 이미 다 보았습니다. 산수에 대한 고질과 취벽은 아직도 다함이 없습니다. 고향의 선대 무덤가에서 늙어 죽으면 뜬구름 같은 인생살이에 완전한 복락이 아니겠습니까?”– 《소치실록》 중

인간이 곡선에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곡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는 곡선이며, 우리의 삶 또한 곡선을 닮았다. 인간의 본능적인 심미안을 자극하는 것 역시 곡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법학에서 말하는 곡선이론에 따르면 “사회가 만드는 법 자체는 직선이지만, 사람들의 행위와 삶은 곡선이기에 법률이 그것을 모두 정의할 수 없다”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오래된 미래와 씨앗을 품고 여행을 나서고 있다. 군수는 이 시대와 줄탁동시를 이뤄야 하는 순명을 받았다.

“나 돌아가리라. 이니스프리의 낙원 그 섬으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