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얻었지만 기쁨을 잃어비린 나라” 가장 불확실한 사회, 빈부격차가 가장 높은 사회‘ 그래도 미국식 독점자본주의 이념을 철두철미하게 추종하는 기업 개발론자, 토목공사 출신 경제인을 대통령으로 뽑는 나라. 그러면서도 사회신분 계층 상승을 기대하며 새벽 일자리에서 온 몸이 프레스로 납작해지는 오징어게임에 몰두하는 이름만의 중산층들.
노르웨이로 떠나버린 철학자 박노자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과연 우리나라는 선진국가의 모범인가. 자본주의국가가 다다르지 못하는 동방예의지국 효와 충이 앞선 나라. 왜 이 땅의 청년들은 개옹에서 투신해 자살을 하는 것일까. 최신식 초고속 인터넷이 가장 많이 보급된 최 일류의 사회.
우리사회는 물풍선이다. 80, 90년대 고도성장의 에너지가 고갈되고, IMF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소득 양극화의 심화를 감춘 저성장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실물경제가 200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저성장 기조로 접어든 것과 함께, 부동산경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국민경제의 절반을 차지하는 민간소비의 극심한 정체는 성장잠재력의 소진으로 이어졌고, 결국 재벌중심의 성장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손질 없이 한국경제의 미래는 불투명하다는 진단을 받은 지 오래이다. 저성장 시대는 단순히 경제적 현상만이 아니다. 당연히 다양한 사회적인 위기를 동반한다. 비정규직 확대, 양극화 심화, 지역경제 위축, 공공서비스와 복지의 후퇴에 더하여 지방은 인구절벽, 지방소멸, 초고령화 사회 등 업친 데 덮친 격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만고의 진리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린 물은 개천과 강으로 흘러들어 거대한 호수를 만들기도 하고, 종국에는 바다에 이른다.
물이 흘러 모이는 곳은 마르지 않는다. 마르지 않는 낮은 곳에 생명이 잉태하고 성장한다.
낮음과 낮춤의 현묘함을 표현한 말이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는 뜻의 곡신불사(谷神不死)다. 가뭄으로 온 세상이 타들어가도 마르지 않는 낮은 계곡은 끈질긴 생명력과 강인한 정신력을 상징한다.
지금의 세태를 보면 온통 높고 강함만을 추구하고 있다. 모두 많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갖고 싶어 한다. 그렇게 거머쥔 권력과 부를 드러내고 싶어 안달한다. 알량한 힘으로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소위 갑질도 결국 자신의 강함과 높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높고 강함은 생각처럼 오래가지 못한다. 종종 진정한 승리는 시간이 흐른 뒤에 결정되곤 한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승리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곡신불사의 정신을 지닌 경우가 많다.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한 것이라는 사회논리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농어촌 사람들이 지닌 첫 번째 덕목은 겸손(謙遜)이었다. 자신을 낮추고 낮은 자세로 사람을 대하는 겸손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겸손은 자주 양보의 미덕을 요구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도 섭섭해하지 않는 아량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겸손은 당장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눈앞의 권력과 이익에 현혹되지 않고 더 멀리 내다봐야 하는데 그럴 경우 당장은 손해처럼 보인다.
두 번째 덕목은 끊임없는 자기반성이다. 반성을 한다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되짚어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잘못을 알고 인정하기에 자신을 낮출 수 있고 잘못을 되짚어 바로잡으려 하기에 나날이 나아진다. 자기반성은 호수와 강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더 많은 물이 모여들게 만드는 준설작업과도 같은 것이다.
세 번째 덕목은 경청(傾聽)이다. 말이 힘이고 권력인 시대에 많은 말을 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 많이 듣는 것이야말로 낮은 자세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날은 SNS를 통해 누구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시대다. 이런 시대가 되면 사람들의 말이 좀 더 품위 있고 절제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걸러지지 않은 말들이 거칠게 내뱉어지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듣기에 거북한 말들이 많아진 만큼 경청하기도 힘들어졌다. 경청을 위해서는 더 큰 인내와 배려가 필요하게 됐다. 인내와 배려는 자신을 낮춰야만 가능한 것이다.
낮은 자세로 삶을 산다는 것은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깊은 강이 고요히 멀리 흐른다', '힘을 통한 제압보다 인내와 배려가 더 큰 울림을 준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권력과 부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소위 '지기추상 대인춘풍(持己秋霜 待人春風)'의 면모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노자가 말한 곡신불사의 낮음의 오묘함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온통 속도와 높이, 강함과 많음,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지금 시대에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은 절제와 낮춤, 부드러움과 고요함, 정직하고 담백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작은 깨우침을 얻었다.
죽음의 도시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 갔던 사람들, 빈민들(the poor)이라는 신인류가 자본주의초기에 출현하였다. 누구보다도 하루하루를 성실한 삶으로 채워갔으나, 비참한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농사짓던 땅을 하루아침에 기업인들에게 빼앗긴 농민이었다. 빈민이란 지역 공동체에서 자신의 역할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에 현대판 빈민이, 역할을 잃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다시 출현하고 있다.
서울 중심의 일극사회(一極社會)는 경제뿐 아니라 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지방에게 더욱 혹독하다. 마치 블랙홀처럼 정책과 예산, 인재를 빨아들이고 있다. 지방은 떡고물이라도 떨어지길 기대하는 처지이다. 지방의 지역경제는 지역내총생산(GRDP)의 대부분이 수도권으로 역외유출되고 있다. 지역경제는 갈수록 휘청거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남과 진도의 사회적경제인들은 ‘사회적경제네트워크 혁신타운’을 추진하는 동력과 경제철학을 추구하고 찾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자활기업에 신협과 소비자 생협 등 사회적경제 조직이 한 공간에 모여 개별조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의 연구 교육 지원 상품개발 금융 등의 집적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지역 집단 공동체와 마을원시공동체기업이 실사구시 정신으로 박노자가 떠나간 북유럽의 롤모델을 어떻게 도입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늘 일본 농촌사회만을 재교육하는 행정제도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찾아야 한다.
사회적경제는 역할을 잃은 사람들의 자유를 향한 여정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역할을 찾기 위해 벌이는 자유를 향한 운동이다. 국가가 민주적으로 경영되어야 하듯이, 지역공동체 차원에서 규범을 만들고 합의하여 추진해나가야 한다. 역할을 되찾고, 자유를 위해 시민들이 함께 연대·협력하여 추진하는 사회적경제야말로 경제민주화와 시민적 권리 회복, 공공서비스와 복지를 포함하는 지역경제 선순환 실현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김희수 진도행정부는 예술로 주민소득을 올리고 선순환 농업정책으로 농업을 미래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미래는 꿈꾸는 자들의 몫이라고 하지요? 진도의 사회적경제는 새로운 희망의 걸음을 힘차게 내딛고 있는 중입니까? 학고 김정호선생이 ‘서울제국과 지방식민주의’는 과연 극복되었는가.
의회제도는 얼마나 만족스러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미니 대의제 군의회는 3만명 군민의 바램과 욕구를 얼마만큼 충족시켜주고 있는가.
진도군이 2국체제를 과감히 해체하고 새로운 행정조직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당연하다. 서울식이나 전남도청식 행정 복지 농수산업 의료건강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고서는 떠밀리셔가 아닌 소외감으로 우울증으로 죽게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