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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향토사(24) 임진왜란과 「왕조실록」 “진도군” 편 기록
재미있는 향토사(24) 임진왜란과 「왕조실록」 “진도군” 편 기록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08.2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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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6.5까지 진도는 침범을 당하지 않아
박병훈 사) 진도아리랑보존회장전 진도문화원장

 

선조 23년91590).2.28

진도의 주민(住民) 사을화동(沙乙火同)이 왜구에 투항하여 그들이 노략질 할 때 향도(導-길을 인도하여 줌) 노릇을 하였는데 일본에서 그를 쇄환(刷還)시켜 왔으므로 왕이 인정전에 나아가 그를 맞이하였다.

선조24년(1591).2.13

임금이 진도군수 이순신(李舜臣)을 특지(特旨)로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除授)하다.

선조 25년(1592)4.14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선조 25년(1592).7.27

진도의 역적 이충범의 목을 베다

진도의 역적 이충범(李忠範), 서몽린(徐蒙린) 등이 모반을 도모 하였는데 광주 판관 이충로(李忠老)가 이들을 체포하여 목을 베었다.

“비밀보고서”를 보니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지금은 평상시가 아닌데 인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욱 통분합니다. 다행히도 즉각 체포 하였으니 그 나머지 무리도 모두 체포되어 이미 진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비상한 일이니 명을 내려 모두 체포하고 군법으로 엄히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에 따랐다.

선조 26년(1593).6.5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전라도 진도는 아직까지 왜구의 침범을 당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선조 26년(1593) 6.5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전라도 진도는 아직까지 왜구의 침범을 당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선조 29년(1596)1.22

전라도 진도는 가장 긴요한 지역인데 지금은 왜구에 탕태되어 백성들이 흩어졌으므로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아뢰다.

선조 30년(1597).9.6.

진도와 제주가 모두 왜구들의 소굴이 되어 서남해의 바다를 종횡으로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게 되었으니 실로 통분합니다. 하고 아뢰다.

선조 30년(1597)10.1

통제사 이순신이 울돌목에서 적을 격파하고 왜장 마다시(麻多時)를 베었다.

통제사가 진도 벽파진에 도착해 병선을 수습하여 10여척을 얻었다. 이때 배를 타고 피난해있던 수많은 인근 주민들이 이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였다. 순신은 그들을 둘로 나누어 군대의 후면에 있으면서 군인들의 성세를 돕도록 하였다.

적장 마다시는 수전(水戰)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난 인물인데 200여 척의 적선을 거느리고 서해를 침범하려 벽파정 아래 울돌목에서 접전을 하게 되었다.

12척의 배에다 대포를 싣고는 조수를 타고 공격하니 적이 달아났으므로 수군의 명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선조 30년(1597)11.10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보고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다 유실되었다. 신이 전라 우수영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함께 전선 13척, 초탐선(哨探船) 32척을 수습하여 명량해협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는데 적의 전선 1백30여척이 몰려 오기에 신이 수사(水使) 김억추, 거제현령 안위(安衛)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碧波亭) 아래 울돌목에서 적을 밪아 죽음을 부릅쓰고 힘것 싸운바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트리니 죽은자들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 속으로 가라 앉았으며 두목들을 벤 것 만도 8명이나 되었다.

적선 중 큰배 한척이 여러 붉은 기(旗)를 세우고 비단 차양을 두르고서 여러 적선을 지휘하며 우리 배를 에워싸는 것을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宗), 영등포 만호 장응두(丁應斗)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깨뜨리자 적이 크게 꺾였고 나머지 적들도 멀리 물러갔는데 우리에게 투항해온 왜놈이 붉은 기가 꽂힌 적선을 가리키며 “안골포(安骨浦)의 적장 마다시(麻多時)다!”하고 외쳤다. 노획한 전리품은 장창(長槍)등 수백 점 인데 이는 이미 절차를 밟아 이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다행히 큰 승리를 거두어 적의 사기가 꺾었으니 앞으로 적선이 서해를 침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아뢰다.

선조 32년(1599),4 6.

왕이 명군 해군 장수 이천상을 접견하다.

“명나라 구원병 장수 이천상(李天常)이 남쪽에서 올라왔다. 이 자는 누구 못지않게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었고 또한 남쪽 수령들을 시켜 자기의 공을 칭송하게 하였으니 그 사람됨을 알아볼 만하다.

천상이 절하고 아뢰되

귀국이 8년 동안 침략을 당해 피해가 많습니다.,고 하니

왕이 왈

상국의 힘에 의지하여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이 외다.고 했다.

천상이 말 하기를

신이 남쪽에 있을 때 주민들이 모두 있어주기를 원했으므로 이제야 겨우 올라 왔습니다. 고 하며 진도군수 선의문(宣義門)의 편지 1통을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저는 털끝 만큼도 피해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 제가 올라올 때 보니 길가에 인기척이 하나도 없었고 내가 나타나면 고을 백성들이 모두 도망가 버리니 저도 멏일 동안 밥을 먹지를 못했습니다.”

천상이 이르는 곳마다 포악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소문만 듣고도 모두가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벽파진 전첩비 사진)

<일제시대 정간, 압수기사>

진도(珍島)사건에 대하여 (1924.12.07.)

1.소작문제가 현하 조선사회 문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중에도 동척과 흥업회사 등 전 국가의 권력을 배경으로 한 특종회사가 거의 전 조선에 뻗치어 횡포한 세염(勢焰)을 발뷔이는 바거니와 이제 이 동척과 흥업이 연결하여 자여(自餘)의 악지주(惡地主)를 그의 조세(助勢)하는 번병(藩屛)으로 하고 다시 폭위(暴威)를 드러내는 경찰의 부동(附同)으로써 하니 남해의 작은 섬 진도의 소작민이 모두 독아(毒牙)에 걸린 어육(魚肉)이 되지 않으면 장차 파소(破巢)한 벌과 같이 사방으로 이산하게 될 것은 면치 못할 형세이다.

소작쟁의가 끊일 새 없던 바이요, 동척의 횡포는 천하 지성을 가진 자가 숙지하는 바이라 자못 경괴(驚怪)할 바 없는 바이지만 금번 그들의 거조는 가장 횡포와 만용과 무치의 전형적인 자로서 다만 언어도단일 뿐이 아니다.

2.자본주의 국가의 특수부대인 동척회사와 그 충실한 반려인 흥업회사가 그와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는 관권과 공동하여 사지(斯地)의 원주민을 억압 또 구축코자 하는 것은 그들의 주구한 수확품과 함께 그의 비고(秘庫)에 감추어 둔 예정의 계획이라. 오인이 새로이 대성질호(大聲疾呼)하기를 기다려 비로소 깨닫도록 세인의 신경은 우둔치 않으려니와 그러나 광천화일(光天化日)의 밑에 공연한 조직적인 폭력으로 안주하는 인민을 구축코자 하는 것은 만인 환시(環視)하는 바에 누구나 분노를 참지 못할 바이요, 성토를 아끼지 않을 바이요, 또는 토사원비(兎死猿悲)의 무궁한 슬픔을 품지 아니치 못할 바이다. 그러나 오인은 다만 필설로써 이를 비판하고 변난(辯難)할 밖에 다른 해결의 길이 없을까?

3.저들이 지방관청의 양해를 본거로써 고발과 차압으론 진격의 무기를 삼고 교제단절, 벌금 등은 그의 진용을 결속하는 군규(軍規)를 삼고 소작회(小作會)에 대한 소작인의 탈회 혹 반역을 강제 또는 유혹하여 써 무산자 단결의 보조를 교란케 하려 하며 그리고 조직적인 폭력군을 지휘하여 농작물의 강제 취득을 자행하며 쟁의조건으로 항의하는 소작인을 난타하여 자못 약탈과 살벌(殺伐)을 겸행하는 그의 행동은 그 소위 산업적 무정부라는 지하의 경제조직 그것을 연상하는 것보다 차라리 진정한 사회적 무정부 상태의 출현을 보고 율연(慄然)히 공포와 참통(慘痛)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4. 진도군 만여호의 농가 중 자작농이 1천 5백호에 불과하니 잔여의 8천 5백호는 모두 가련한 소작농이다. 즉 전 농민의 8할 5분이 모두 실생활의 생활 여탈의 권을 기개의 지주의 손에 달아 둔 바이거니와 횡포로써 천하에 울리는 동척과 흥업회사와 외타 일본인의 소유 토지가 전경지 면적의 4할을 점하는 바 그들은 외타의 악지주들과 호응하여 매년 8할의 수확을 획취(獲取)하고 ××, ×이 있는 자 오히려 6할의 소작료를 받았다 하니 그 횡포와 패려(悖戾)의 정도는 짐작하려니와 열약(劣弱)한 피압박의 처지에 있는 소작민들이 그의 최초요 또 최종인 도생(圖生)의 일책으로 단결과 항쟁의 길을 취한 것은 이미 만부득이한 일이요, 또 정당한 방위적 수단이라. 저들 포학에 익고 탐람(貪람)에 젖은 자들이 이에 그의 자랑인 관권의 발동과 비호를 빌려서 패려한 득승락(得勝樂)을 아뢰고자 하나 오인은 도리어 그들에게 적당한 평어(評語)를 발견키에 괴로운 바이다.

5. 하물며 저들이 박눌유순(朴訥柔順)한 농민의 우매함을 기화로써 인신(印信)을 사용(詐用)하고 문빙(文憑)을 가작(假作)하는 등 그의 누열(陋劣) 야비한 심사는 가장 타기할 만한 바거니와 더구나 동척 흥업 등은 일본인 이민의 초래로 숙석(宿昔)의 포장한 화심(禍心)을 온통으로 발로하려 하며 이에 추수(追隨)하는 누열 또 추악한 조선인의 지주배는 가소(可笑) 또 가증한 효빈(效嚬)으로 중국인의 이입책을 운위하니 이러한 후안무치, 동서불분(不分)의 저능적 완명자류(頑冥者流)는 도리어 연민(憐憫)함직하지 않은가.

특권계급을 편벽되게 옹호하고 소작민의 처벌에 급급하여 수소(愁訴)하는 유린된 소작민에게 향하여 “해결되기까지 어찌할 수 없다”는 무치(無恥)한 발언을 하는 경찰당국의 태도는 봉산군(鳳山郡)의 동척 소작인을 대하여 냉혹한 폭언을 발한 왜성대(倭城臺)의 시도(矢島) 씨와 함께 가장 이신동체의 해괴한 태도이라 할 것이다.

아아, 진도 5만여의 인민을 생탄(生呑)하려는 현세의 마왕이여! 행여나 스스로 저주될 물건을 짓지 말라! (1924.12.07.)

<진도읍 역대면읍장>

한일강제합병 이후 1910년 6월 22일부터 21년6월까지총 11년간 김영기(읍 남산리)씨가 면장을 하였으며 2대에 허 찬(의신 초사리.4년 10개월), 3대 이달성(쌍정리.7년 9개월), 소진춘(남동리)으로 허찬씨는 39년(3년 6개월) 다시 면장을 했다. 문제의 복도이랑은 44년부터 해방 후 46년 2월 까지이며 읍 자료에 의하면 출신지역이 일본으로 되어있다.

이후 전쟁 당시에는 이달성, 박희수에 이어 허정돈(동외리)씨가 61년까지 9년간 재임, 허 원, 박재철, 벅기남(해창), 송상선(염장), 주광석(덕병), 박종석 김희동 등으로 이어 이문교(2회), 이양래, 이원석, 한창범으로 해방후 18대이다.

<진도의 소작인 운동>

1924년 7월에는 진도에 소작인회가 조직되어 1년여 만에 회원 수 5,000으로 늘어났다. 이 소작인회는 창립총회에서 소작료 납입은 4할에 준하여 실행 하겠다 하고, 이 조건을 따르지 않을 때는 납입하지 않겠다는 ‘소작료불납동맹’을 결의하였다. 지주 측도 이에 맞서기 위해 ‘지주인회’를 열어 대응방안을 모색하였고, 이에 따라 1924~1925년에 걸쳐 소작료 인하 등을 요구하는 소작쟁의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소작쟁의는 몇 사람의 주동자가 경찰에 구금되고, 또 지주 측의 회유와 설득 등에 의해 지주와 소작인 어느 쪽도 일방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타협에 의해 마무리되었는데 ‘소작료는 5할로 하되 다만 관습 또는 사정에 의해 그 이하로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한다. 이 소작쟁의를 주도한 인물은 소진호(蘇鎭浩), 박종협, 박순직(朴淳稷) 등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또한 주목되는 사건으로는 1934년 4월에 결성된 「진도적색농민조합」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이 적색조합운동은 곽재술(郭在述)·조규선(曺圭先)·곽재필(郭在必)·박종협·박종춘(朴鍾春)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으며, 그 행동강령을 보면 농민들의 현실적 문제에 깊이 개입하여 소작농민들의 일상적인 이익을 옹호하려는 것으로 채워져 있으나 다른 지역의 농민조합운동에서 보이는 정치적 성격의 강령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한다. 그러나 불과 4개월여의 짧은 기간 만인 1934년 8월에 해체됨으로써 진도지방의 민족운동에 끼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진도 지역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저항과 독립을 위한 투쟁은 멈출 줄 몰랐다. 일본의 경찰서나 농사 경영자 습격, 3·1만세운동, 소작쟁의 등의 항일운동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진도적색농민조합과 같은 조직이 해체됨으로써 농민운동·노동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1924년 12월 복도이랑 등이 군내면 소작인집에 몰려가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이는 진도 지주회의 사주를 받은 행위였다. 이는 살인적인 소작료 8월 5푼을 강제 집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복도이랑이 진도읍사무소 이재권 총무담당의 말처럼 일본인이 아닌 창씨개명을 했을 뿐이라지만 그간의 행위는 친일행위 지주파 편을 들은 전력이라 진도면장으로서는 옳지 못한 행위가 분명하다. 부역행위는 아니더라도 당시 수많은 소작인들에겐 지주보다 더 악질적인 인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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