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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도(藝都 : 민속문화예술의 수도) 진도(珍島)」
「예도(藝都 : 민속문화예술의 수도) 진도(珍島)」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11.2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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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관 진도군 고군면 오일시 2길 103-5

우리 진도군은 2022년 8월 1일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3종[강강술래(2009), 아리랑(2011), 농악(2014)], 유형문화재 27종(국가 12, 도 15), 무형문화재 12종(국가 5, 도 7) 보유자 15명(국가 6, 도 9)이다. 향토문화유산은 36종(유형 23, 무형 13)이다. 대단하다. 더구나 진도를 주제로 연구한 학자들을 보면 2022년 10월 14일 현재 석사학위 262명, 박사학위 논문 발표자가 39명이나 되는 빼어난 고장이다. 섬과 섬들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산, 바다, 하늘이 신바람으로 어우러진 진도는 풍광만큼 「민속문화예술」의 본향임을 자랑한다.

진도의 「민속문화예술」의 중심은 시((詩)·서(書)·화(畫)·창(唱)이다. 시(詩)는 유배인들을 중심으로 많이 창작되었다. 우리 고장 진도에는 걸출한 선비들이 유배 와서 생활했던 곳이다. 특히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선생은 19년간이나 유배 생활을 하면서 진도의 풍속에 예속을 심어 ‘진도개화지조(珍島開化之祖)’로 불린다. 진도에 들어온 지 5년 만에 지산면 안치에 초옥 삼 간을 지어 ‘소재(蘇齋)’라 이름 짓고 정좌하여 경사를 연구하였으며,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을 비롯한 1,023수에 이르는 한시(漢詩)를 지었으며 진도에서 현지처[우씨]를 두어 노계래(盧戒來) 등 3형제를 낳는 등 진도와 인연이 깊은 문인이다.

또한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1858~1936) 선생도 12년간의 유배 중에 진도에 글방을 열고 2세 교육에 힘썼으며, 진도 땅에 예술과 문화의 씨를 뿌린 개척자로서 진도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소재 노수신과 함께 수많은 진도 유배 인물 중에서 유배 기간이 길었던 관계로 진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만조가 금갑도로 유배된 것을 안 이 고장 출신 문사들과 연소자들이 그를 찾아 가르침을 청하고 교유한 것이 『은파유필(恩波濡筆)』이라는 저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의 한시 중 명시로 내세울 수 있다. 진도군수의 청에 의하여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이 살았던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진도읍 동외리 원동마을에 글방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이때 어린아이였던 의재(毅齋) 허백련(許白鍊, 1891~1976)도 8살 때 그의 공부방을 찾아가 글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에게 글을 배운 사람들이 상당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유배자들이 240명 정도라고 하며 대부분 문인의 정치가였으니, 이분들의 식솔, 친지, 제자, 동료들이 찾아와서 진도 지역 문화 예술에 끼친 영향은 상당하였으리라 추정한다.

소전 손재형

서(書)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 이래 서예계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있는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 선생을 비롯한 그의 제자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1926~2007) 선생 등 서예 명인을 다수 배출했다.

화(畵)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5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2) 집안의 남종화풍 화맥과 친척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까지 포함하면, 진도 양천(陽川) 허씨(許氏)들의 뛰어난 화맥은 한국화의 명문대가로 각광받고 있다. 허련은 19세기 문화예술의 거목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애제자이다.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가 있던 소치 허련은 28세 때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一枝庵)으로 초의선사[草衣禪師, 장의순(張意恂), 1786~1866]를 찾아가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인연을 맺었다. 다방면의 화재에 능통했지만 산수화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허련의 산수화는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엿볼 수 있고, 산수화 외에 진한 먹을 대담하고 능란하게 구사한 사군자, 모란, 파초, 괴석, 노송, 연화 그림도 특징적인 개성미를 지녔다. 스승 추사 김정희는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소치 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만남은 사제지간의 돈독한 정을 보여주는 특별한 만남으로 후학들의 본보기로 전해진다. 진도는 예부터 소치 허련을 이어 남종화의 명인이 다수 배출되었고, 전국에서 이름을 내놓을 만한 화가 중에는 진도 출신의 화가가 많게 손꼽힌다.

창(唱)은 진도가 「민속문화예술」의 보고(寶庫)로 널리 알려졌다. 남도소리의 대표적인 본향은 진도다. 진도 「민속문화예술」은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 다양하며 특이하다. 「민속문화예술」 분야에 유․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전술한 바와 같이 다수 존재하고 있는 곳은 진도뿐이다. 진도는 우리나라 「민속문화예술」의 본거지이며 전통 「민속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해내고 있다.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진도북놀이, 남도잡가, 무속 문화로 진도씻김굿․진도다시래기․진도만가 등이 진도의 대표적인 「민속문화예술」로 꼽힌다.

진도군에서는 시·서·화·창을 비롯한 풍부한 「민속문화예술」 자원의 가치를 높이고 이를 체계적으로 전승·보전시키기 위해 2012년부터 진도 문화예술제를 개최해 오고 있으며 볼거리들도 풍성하게 제공해 오고 있다. 강강술래와 아리랑 등 무형문화재도 많아 2013년 전국 최초로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었다. 진도는 특별한 유․무형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빼어난 고장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精神) 문화를 이끄는 힘은 무엇일까? 진도 사람들은 희로애락의 정(情), 한(恨), 숭(崇), 흥(興), 끼를 끈기와 신명으로 승화하여 「민속문화예술」의 정수(精髓)로 꽃피웠다. 진도 사람들은 웃어른이나 선배에게는 깍듯하며, 동료에게는 친근한 심성을 갖고 있다. 또한 어떤 일을 하면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가는 생활 습관을 갖고 있다. 「민속문화예술」 활동을 하면서도 일로 생각하지 않고 재미있는 놀이로 생각하며 즐긴다. 참으로 대단하고 볼수록 아리땁다. 문화는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고 T.S. 엘리엇(1888~1965, 『황무지』 노벨문학상 수상, 1948)은 갈파했다.

그렇다면 이런 정신문화의 원류는 무엇일까? 필자는 전술한 바와 같이 유배문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진도의 민속문화예술을 이끈 힘은 유배문학의 한시(漢詩)라 추론한다. 한시는 우리나라 문학의 원류다. 시는 무엇으로 적는가? 글[문(文)]이다. 글에서 시(詩), 서(書), 화(畵), 창(唱)이 창달되었다. 글이 없는 시․서․화․창은 생각해 볼 수 없다. 그래서 ‘「민속문화예술」의 출발점은 문학(文學)이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글[문(文)]이 진도 「민속문화예술」의 대표적인 정신일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글은 어느 지역에나 공용된 문자이니 대표성이 부족하다. 그러면 무엇일까? 진도의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예(藝)」다. 곁들인다면 [예도(藝道) : 「민속문화예술」을 배우고 닦아나가는 삶의 길]라고 생각한다. 시․서․화․창, 유․무형문화재가 모두 문화유산으로 「예(藝)」의 산물이다. 진도의 「예(藝)」는 예도(藝道)의 삶으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표현되고 창작되어 연행되었다. 예술(藝術)은 진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래서 인근 각 지역에서 자신들의 「민속문화예술」 활동과 유․무형 문화재를 내세워 예향(藝鄕)이라고 부르짖는다.

지역마다 자긍심을 갖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진도는 예향(藝鄕)을 넘어섰다. 진도는 대부분의 「민속문화예술」 활동들이 원형(原形)을 유지하고 있다. 진도 사람들은 예술적인 DNA(유전자 본체)를 타고났다. 정신사의 흐름이 예부터 「민속문화예술」의 혼불로 끊임없이 갈고 닦는 藝道(예도)로 승화되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진도를 「민속문화예술」의 도읍지[수도(首都)]인 「예도(藝都)」라고 칭해야 한다고 갈파한다.

반문할 수도 있지만, 항몽 유적지로 삼별초(진도 1270~1271, 제주도 ~1273)는 승화후온(承化候溫, ?~1271)을 왕으로 옹립하여 진도 용장성에 고려 왕권에 대립하는 정부[왕도(王都)]를 세워 항몽 전쟁을 치렀다. 나라가 풍전등화일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의 뛰어난 전략으로 나라를 구한 1597년 9월 16일 명량대첩지(鳴梁大捷地)이며,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의 10배 이상이나 되는 적을 맞아 좁은 수로와 거센 물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일본 수군의 기세를 꺾고 서해 진출을 막아내 조선군에게 승리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후 1년쯤 지난 1593년 7월에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 1564∼1627)에게 보낸 편지에서 “절상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시무국가(竊想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했다. 이는 “가만히 생각하건대,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는 말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5월 23일부터 1598년 12월 16일까지 약 7년간 조선과 일본(도요토미 정권)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당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도와 우수영 백성들의 의병 정신이 나라를 구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이 전쟁에서 조선의 산야는 피로 물들어졌고, 일본은 목을 베는 만행도 부족하여 코와 귀를 베어가 전리품의 하나로 삼았다. 아! 정유재란에서 명량대첩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필자는 약무진도시무호남(若無珍島是無湖南)이라 생각한다. 진도 사람들은 충효(忠孝) 정신이 남다르다. 또한 「민속문화예술」을 이끄는 곳이 진도이고, 대륙과 해양 문화로 진출하는 길목이 바로 진도다.

유․무형 문화재나 「민속문화예술」인들의 예혼(藝魂)을 살펴봐도 「예도(藝都)」로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진도는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었다. 「예도(藝都)」로 손색 됨이 없기에 인정되어 지정했지 않은가? 혹자는 예불여진도(藝不如珍島)라고 한다. 조선 중기 성균관 대사성과 충청관찰사와 이조참의를 지낸 몽암(夢菴) 이숙함(李淑瑊, ?∼?) 선생은 “보배의 섬 진도는 남쪽 고을에서 최고의 보화를 간직한 곳[진지위도 보장재부 위남주최(珍之爲島 寶藏財府 爲南州最)]”라고 했다. 「민속문화예술」 부문은 무쌍(無雙)의 진도다.

사회 사상사를 살펴보면 사람 중심의 정신문화가 지역 정서이고 그 정신문화가 주류를 이뤄 그 지역을 이끌고 가는 동력이 되었다. 동력을 보면 앞길을 예견할 수 있다. 정신문화가 바르다면 가꾸고 고양시켜 발전하는 기틀이 되도록 이끌어가야 하지만, 잘못된 방향이라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은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진도군과 진도군의회를 비롯한 군민들은 우리 진도의 「민속문화예술」인들에게 자긍심을 갖고 꾸준히 연찬하고 연행되도록 우대해주어 문예부흥(文藝復興, Renaissance)의 시대가 꽃피도록 아낌없이 성원해 주어야 한다. 이 시대의 진도 사람들은 「예도(藝都)」로 가꾸며 살아가는 시대적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진도를 향토색(鄕土色) 깊은 「예도(藝都)」로 「민속문화예술」을 창달(暢達)시켜가야 긍지 높은 자존감의 지역으로 나날이 각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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