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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자화상은 무엇인가?
우리시대의 자화상은 무엇인가?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12.0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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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자신에 대한 모습을 그리거나 혹은 누가 나의 삶이 담긴 초상화는 무엇인가 궁금해하는 경우가 많다.

                                                                      (제주도 완당을 찾아간 소치부자 합작도. 제주도문화재)

요즘 말로 ‘그의 그림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라는 시적운율이 절로 따라온다면 예술가로서 기쁨이 말할 나위가 없을것이다. 그러나 우리시대는 온통 일그러진 자화상들이 넘친다. 우리가 찾아 다다르고 싶었던 이상향 선진국 GDP 평균을 웃도는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한껏 자존심을 내세우기도 하며 ‘세계화’의 중심에 진입한 배달민족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다도해 맹골수도에서 침몰한 세월호의 비극과 최근 서울 한 복판 용산 이태원에서 일어난 한 밤중의 압사사건은 그야말로 우리사회의 처절한 압축도인 초상화였다. 너무도 슬프고 기괴스롭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그러진 자화상’ 생얼과 만나는 멍 때리는 충격은 어떤 진실을 규명하고 사회구조 개선을 이루었는가. 아직도 깨지지 않는 유리벽과 신새벽의 스크린도어 그리고 반지하방의 물이 새는 방주사건이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었다.

용산은 어디인가“ 청나라와 일제가 강점하며 총독부 관저와 사령부를 두었던 곳. 미국의 점령지로 미국문화가 자연스레 거리마다 흐르고 있는 곳. 우리는 그런 곳에서 화려한 번영의 불꽃놀이를 즐겨온 것이다.

그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조선 시대의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성장기엔 수많은 예술가들의 초상화와 자화상을 작품으로 만난 적이 많다. 때로는 감탄하고 또 어떤 때에는 전율하며 정면성을 피하게 되기도 한다. 문학예술인들도 자화상을 그린다. 백석의 시들은 대부분 일기이자 자화상이다. 이상의 ‘날개’도 마찬가지다. 소치 허련선생의 운림각도는 초여름의 산책하는, 소요하는 어느 날의 자화상이다. 

최근 두 개의 초상화를 보았다. 하나는 이 시대의 화인 김호석이 그린 다양한 한국사회 비주류 인물자화상군과 환경 미래실천운동가인 헬레나 호지의 ‘오래된 미래’가 담긴 모습이었다. 김호석은 수묵한국화로 번구대나 알타이 벽 암각화처럼 소외된 노인들의 우웃과 아이들을 담아냈다. 그는 최근에 ”소치 허련이 그린 초의선사 초상화가 진본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내놓아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미술사가 강우방씨가 유홍준의 추사작으로 알고있는 서예작품 ‘산숭해심(山崇海深)이 위작이라고 한 것처럼.

화가이자 미술사를 전공한 김 씨는 그림에 있는 방석, 찻주전자와 다기, 책 상자인 포갑 등이 일본식이라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방석은 일본식 문양이 들어 있고 두께가 지나치게 얇다는 점이 이상하고, 다기는 조선의 미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림의 재질인 비단도 조선시대 비단과는 구조가 전혀 다른 반면, 일본에서 근대에 생산된 제품의 짜임새와 동일하다고 말했다.

그는 "위당(정인보)집의 글과 초의선사 진영의 화제가 전체적으로 유사하나 첨가되거나 누락된 글자가 있다"면서 여러 면에서 진품으로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고 주장했다.

또 초의선사의 해동 다맥(茶脈)을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응송 스님(1893∼1990)의 저작인 '동다정통고'에는 "소치는 초의선사를 그렸다. 이 초상화는 그가 그린 추사의 초상화와 함께 가작(佳作)에 속한다. 초의선사의 초상화는 채색하지 않은 백묘법으로 그렸다"는 내용이 있다.

응송 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소치가 완성한 초의선사 진영은 먹으로만 그린 그림이지만, 소치가 그렸다고 전하는 초의선사 진영은 화려한 색이 들어간 채색화여서 진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운림각도(雲林閣圖)로 들어가보자.

가파르게 흐르던 계곡물이 깊은 산중을 빠져나와 잠시 한숨을 돌린다. 물이 머무는 곳에는 꽃이 피고 새가 날아오기 마련이다. 사람이 봐도 이만한 장소가 없겠다 싶을 정도로 멋진 풍경이다. 그림은 산과 나무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화면 뒤쪽으로 푸르스름하게 배치된 먼 산을 보니 이곳이 제법 깊은 산중임을 알 수 있다.

왼쪽 상단 제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마음 가는 대로 『주역』『국풍』『좌씨전』『이소』『사기』 그리고 한유(韓愈)와 소동파(蘇東坡)와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몇 편을 읽네(隨意讀周易國風左氏傳離騷太史公書及韓蘇陶杜詩數篇)”

이 문장은 남송의 나대경(羅大經:1196-1242)이 지은 「산거(山居)」에 나온다. ‘산거’는 산에 산다는 뜻이다. 산에 사는 사연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나대경이 제시한 사연은 김소월이「산유화」에서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라고 읊었던 심정과 같아보인다.

이 그림은 산수를 보여주기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다. 정자 안의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 계곡물이 수각의 종아리에 부딪치는 소리에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가 더해진다. 글 읽는 선비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누리고 싶은 사치다. 정조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단원(김홍도)은 시창청공(詩窓淸供)에서 유유히 해금을 뜯으며 하일을 즐긴다.

대상이 누구인지 피사체의 외면을 뚫고 들어가 요동치는 내면을 자아내 그려낼 때 그 자화상은 그 시대와 사실주의를 재대로 구현하는 것이다. 난세의 관상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하는 고통스러움이 수반된 자화상은 이율배반의 변증법이다. 철저할수록 나의 본능과 멀어지는 저 집요한 눈빛, 참구하지 못하고 산 속으로 벽면으로 도망가는 선(禪) 수행자들.

윤두서는 '조선의 다 빈치'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뛰어난 천재로 다채롭다. 그가 있었기에 조선 회화 황금기를 이끈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호랑이 선비'처럼 생긴 윤두서는 의외의(?) 따뜻함을 갖춘 그 시대 최고의 반전남이기도 하다. 눈썹은 하늘로 솟고 있다. 눈은 폐부를 찌르듯 강렬하다. 꾹 다문 입술은 고집스럽다. 구레나룻부터 이어지는 수염은 강철 덤불 같다.

소치의 그림은 마루난간을 쓱쓱 그린 붓질이 워낙 거칠어서 지두화(指頭畵)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두화는 붓 대신 손가락, 손톱, 손바닥 등의 신체 일부를 이용하여 그린 그림을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화가들이 나대경의 「산거」를 주제로 ‘산거도’를 그렸다. 정선을 비롯 유행하게 된 이유를 “은퇴한 관리가 수려한 산간 계곡에 별장이나 저택을 짓고 말년을 보내는 것이 유행”하였다고 분석하고, 그 장소를 그리게 함으로써 “조성자의 개인적 위신과 가세를 과시”하였기 때문에 초상화를 대신하는 기능을 갖게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동양의 ‘무명씨’는 영어의 ‘하찮은 사람(nobody)’이 아니다. 대단한 내공을 갖춘 숨은 실력자이나 그 신분을 감추고 있는 이를 일컫는다.

운림산방이란 첨찰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조석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림산방은 늦은 석양보다 이른 아침에 운 림산방이라 불리는 그 운치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다. 특히 봄비가 내린 뒤 희미한 운해 속에 드러나는 풍광을 바 라볼 때 멀리서 판소리 장단과 빠른 자진모리의 장단이 운 무와 어우러질 수 있다면 선율을 타고 오는, 짙푸른 녹엽매향을 가슴과 눈으로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그림은 제자가 유배지의 스승을 그린 작품이다. 뭣보다 옷거리에 눈이 간다. 귀양 사는 처지에 관복(官服)은 당치 않지만 명색이 고관 출신인데 삿갓과 나막신은 뜻밖이다. 구김이 간 겉옷도 변변찮다. 눈썹과 눈매가 섬약하나 낯빛은 온화하고 웃음이 인자하다. 여전히 생뚱스러운 건 삿갓에 나막신 차림이다. 스승의 귀양살이를 제 눈으로 본 제자는 가슴이 아렸다. 소동파(蘇東坡)의 옛일이 떠올랐다. 동파가 유배 시절 길 가다 폭우를 만났다. 삿갓과 나막신을 빌린 그가 옷자락을 쥐고 진창에서 뒤뚱거리자 사람들이 보고 웃었다. 천하제일의 문장가인 동파도 딱한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 배소(配所)다. 스승의 동파 사랑은 유난했다. 그걸 아는 제자는 스승을 비 온 날의 동파 옷차림으로 바꿔 그렸다. 요즘 말로 '동파 코스프레'다. 스승을 동파와 같은 반열에 놓고 싶었던 것이다.

일마 전 임농 하철경(전 한국예술문화인총연합회 회장 역임) 화백의 생을 그려낸 자전적 소설 2권이 나와 눈길을 끈다. 잘 아닌 지인 문인이 구술을 받아 섬세하고 깊이있게, 미술에 대한 조예를 바탕으로 또 하나의 자화상을 낸 것이다. 허 소치의 소치실록(초기 몽연록)에 이어 두 번째가 아닌가 한다. 이 또한 축복이 분명하다. 남농 허건이라는 걸출한 당대의 거장 아래서 그림을 배웠으며 여러 전국 유명미술대전에서 뛰어난 실력을 내보이면서 일찍 한국화단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진도출신의 유명 화인들은 많다. 의재 허백련의 생애는 그의 제자들과 연진회에서 펴낸 것으로 알려졌다. 남농 또한 마찬가지다. 소전 손재형 서예가에 대한 자화상 대신 정부훈장을 가스에 단 사진이 소전미술관에 걸려있을 뿐이다. 금봉 박행보, 옥산 김옥진, 옥전 강지주, 전정 박항환 누구도 자화상같은 자서전을 펴내지 않은 상태다.

나는 이제 우리시대의 진도와 관련된 자화상을 요구하고 있다. 나 자신이 고향인 진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진도는 지금 급격하지 않은,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난파선인가 아니면 새로운 항해를 위해 부질없는 무게와 인습을 비우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난 12년 동안 이동진시대라는 민선시기를 처음 경험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향우 예술인들이 작품들을 진도군에 기증하였다. 고산 김민재, 서양화가 이옥진, 지금도 많은 화가들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진도군청은 이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궁구해야 한다.

인구 3만의 소도읍 진도. 진도는 숨겨진 샹그릴라 ‘오래된 미래’의 씨앗이 숨겨둔 곳일까. 지금 한국은 지방과 농촌의 소멸이라는 절박한 화두와 만나고 있다. 누군가는 거대한 양로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올 여름 마침내 김희수군수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러나 앞으로 넘어야 할 파도는 높고 가파르다. 바다와 농업이 대안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또 다른 계급사회 신분제, 제 땅에서 유배된 삶을 강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카테이프를 틀어놓고 풍년가나 흥타령에 저정 있는 것은 아닌지 내면의 자화상을 저절로 떠오르게 한다.

자화상은 누가 그려주지 않는다. 초상화도 폐부를 찌르는 교감이 이뤄져야 제대로 소통과 우리 시대의 공동체 담론을 나눌 수가 있다.

<다시, 오래된 미래>를 강조하고 있는 헬레나 호지, 아직도 호미 하나로 옥주들판과 싸우고 있는 수많은 여성 농민들과 정성숙 소설가. 진도문화라는 소멸의식이 스멀스멀 등허리를 돌아다니는 ‘기생충’의 민속문화에 사로잡힌 진도의 수많은 민속예인들. 이 또한 분명한 현실주의(사실주의) 현상이다. 사람은 애초에 놀고 먹기 위하여 일을 한다. 노는 데는 천 년이 넘도록 도통이 난 이들이 ‘진도 것들’이다. 마이크와 멍석이라도 깔아놓으면 펄펄 난다.

요즘 진도학회(최소단위 지자체 진도)가 과거의 연구 조사 실적을 바탕으로 진정으로 유익한 먹거리가 되는지 열심히 재살펴보며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진도의 농업도 아열대작물재배로 돌아서고 있다. 바다의 온난화도 대세다. ‘서울식’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우리들만의 무릉도원, 라다크를 지키고 만들어가야 한다. 예술은 그 위에서 꽃을 핀다. 바다가 더 푸르게 된다. 자화상은 궁극적으로 내가 그리는 것이다.(2022.11.26. 성동재에서 남인)

서민 초상화에 눈을 준 돌린 공재

윤두서는 가장 친한 벗 심득경이 죽고 나서 그의 초상화를 그려 상갓집에 보낸 적이 있는데요. 그 집안사람들은 "죽은 심득경이 살아서 돌아왔구나!"라며 펑펑 울었습니다. 심득경의 외면과 내면, 그 사회의 분위기까지 담겨있기에 느낄 수 있는 감동이었겠지요. 이 또한 윤두서가 사실주의 정점에 올랐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윤두서가 등장하기 전 조선 초기~중기의 자화상 내지 초상화는 어땠을까요. 얼굴을 창백할 만큼 맑게 표현한 그림이 많습니다. 표정도 없고, 강조하는 곳도 적습니다. 옷차림도 신선이나 도사 같은 게 많습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줍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곧장 기억 속에서 흐릿해집니다. 나름의 멋이 있지만 밋밋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합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에는 그간 우리 미술사에서 볼 수 없던 특이한 점이 또 있는데요. 눈싸움하듯 정면을 보고 있지요. 한반도에서 측면 아닌 정면 초상화가 나온 건 처음이었습니다. 때마침 거울 역할을 한 백동경의 등장도 한몫했지만요.

윤두서는 조선이 낳은 첫 서민풍속 화가입니다. 그의 사실주의는 자화상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윤두서는 서민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둡니다. 그간 아무도 하지 않은 파격이었습니다. 왕이나 양반 등 '귀하신 몸'을 그리기에 바빠 감히 서민을 내세울 생각을 하지 않은 겁니다. 윤두서는 이 금기를 깹니다. 서민이 밭 가는 모습, 나물을 캐고 짚신을 삼는 모습 등을 그대로 그립니다. 윤두서의 후배 남태응은 "윤두서는 머슴아이를 그릴 때도 앞에 세워놓고 움직이게 했다"고 썼습니다. 윤두서는 그렇게 서민을 직접 보며 이들이 품은 한(恨)의 정서부터 애환과 비통, 체념까지 보정 없이 칠합니다. 혁명적 발상입니다. 서민을 주인공으로 삼는 일을 넘어 감정의 주체로 표현한 겁니다.

윤두서 이전에도 서민풍속화 비슷한 게 있긴 했는데요. 주로 임금의 정치·행정용 참고 자료였습니다. 예술이 아니라 교재였습니다. 속화(俗畫·저속한 그림)로도 불렸습니다. 뜯어보면 서민이 주인공도 아니었습니다. 주제는 시장이나 경기장 등 현장 자체였습니다. 그림 속 서민은 소품이었습니다. 굳이 안 보고도 그릴 수 있는 감자나 옥수수 같은 존재였습니다.

윤두서는 조선에 내려온 첫 정물화가기도 합니다. 윤두서는 꽃과 과일을 직접 '예쁘게' 배치한 뒤 그림을 그린 한반도 최초의 화가였습니다. 수박, 참외, 가지 등 여름 과일과 채소를 쟁반에 놓고 자리를 바꿔가며 그리기를 즐겼습니다. 감각이 있었던 겁니다. 이전 화가들도 풀과 열매 등을 그렸지만, 굳이 구성과 배치에 힘을 쏟지는 않았습니다.

두 여인이 산비탈에서 나물을 캡니다. 머리에 수건을 둘렀습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긴 치마가 불편한지 걷어 올렸습니다. 허리 굽힌 여인은 한 손에 나물 캐는 칼, 다른 손에 망태기를 쥐었습니다. 옆 여인은 몸을 쭉 펴고 한숨 돌리는 듯합니다. 이른 봄날입니다. 제비가 힘차게 날아갑니다. 갈대와 잡풀이 막 기지개를 켭니다. 엷은 먹으로 칠한 먼 산은 병풍처럼 서 있습니다. 윤두서의 채애도(採艾圖·나물 캐는 여인·연대 미상)입니다. 쑥 애(艾)를 제목으로 달았으니 캐는 나물은 쑥일 겁니다.

이 그림은 한국 회화사상 제대로 된 첫 서민풍속화입니다. 나아가 그 시절 '일하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작품입니다. 일에 몰두하는 자세, 잠시 한눈파는 모습을 솔직하게 담았습니다. 비루한 삶 속 먹고 살기 위한 의지와 피로가 절절히 묻어납니다. 다른 화가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장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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