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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진도향토사 안찰사 ‘영헌공’ 김지대의 용기가 그립다
재미있는 진도향토사 안찰사 ‘영헌공’ 김지대의 용기가 그립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09.0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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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권력 아들 최항 간담을 서늘케 진도에서 쫓아내

어려울 땐 정도를 걸으라 했다. 어느 시대에나 대의에 목숨을 걸고 ‘권력자든 백성이든 지켜야 할 도리’를 설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려 시대의 ‘영헌공’ 김지대는 절대 권력자 아들의 횡포에 법과 도리를 내세워 맞섰다.

막스 베버는 권력에 대해 “권력이란 타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이다.”라고 했다.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권력을 쥔 자는 ‘타인의 의지에 관계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했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권력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누구일까? 많았지만 진도와 관련 우리 역사 최강의 권력자 중 하나로 최이(崔怡)가 떠오른다. 고려 최씨 무인 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 무신 정권 시대를 통틀어 최장기 권력자이며(무려 30년) 몽골의 침략으로 온 국토가 쑥밭이 되는 상황에서도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살다가 편안하게 눈감은 사람이다.

 

대개 고려 사람들은 이 극강의 권력자 앞에서 혹여 그 비위를 거스를까, 혹시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았을 것 같다. 어느 시대에나 대의(大義)에 목숨을 걸고 권력자든 백성이든 지켜야 할 도리가 있음을 설파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익제(益齊) 이재현 선생의 문집 역옹패설에 담겨 있는 것을 옮겨본다. 익제 이재현 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 대학자이며 최고의 벼슬인 문화시중의 관직에 있었고 오늘날 많은 서예가들이 그의 싯귀(詩句)를 붓글씨 대상으로 삼고 있다. < 진양공(晋陽公)의 서자인 만전(萬全.승명)은 진도군의 한 절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이 되어 혜심의 문하에 들어갔지만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횡포를 부렸다. 무리들은 횡포하고 방자하고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통지(通知)라는 자가 더욱 심하였다. 영헌공(英憲公) 김지대가 전라도 안찰사로 갔는데 그들이 뵙고자 하는 것과 청탁을 하는 것에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公이 일찍이 그 절에 갔더니 만전이 업신여기고 욕을 하면서 나와 보지 않았다. 公이 바로 들어가서 마루위에 올라 거문고를 잡았다. 두어 번 타고 피리를 불어댔다. 그 소리가 비장하였는데 이에 만전이 흔연히 나와 웃음을 띄고 짐짓 사과하며 함께 해가 저물도록 즐겨 술을 마셨다. 만전은 公에게 여러 가지 부탁을 하였는데 公은 진영에 돌아가서 그 부탁을 한번 검토해 보리라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公은 그 부탁을 들어주기는커녕 심부름 온 만전의 수하사람을 묶도록 하고 강물에 던져 죽였다. 진양공이 죽고 만전이가 정권을 잡았는데 그가 진평공(晋平公) 최항(崔沆)이다.

최항은 전날의 감정을 김지대에게 품고 있었으나 그가 청렴하고 근신하여 공직자로서 과오가 없었음에 가히 그를 해치 못하였다.> 중 만전은 본명이 최항이고 고려 무신정권시대 세 번째로 정권을 잡았던 인물이다. 전라도안찰사는 오늘날 도지사와 같은 직위이다. 그의 최종 벼슬은 오늘날 장관급에 속하는 평장사(平章事) 직위였다. 중 만전이 최항이란 이름으로 정권을 잡았어도 공명정대하고 청렴하였던 김지대를 지난날 자기에게 섭섭함을 보인 일이 있었어도 어쩌지 못하였다는 기록을 비단 익제 이재현의 글이 아닌 곳에서도 볼 수 있다

▶ 고종4년(1217) 거란족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의 경내로 자주 침범하여 고려측에서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조총을 원수로 삼아 군대를 이끌게 하였다. 전쟁을 앞두고 원수 조총이 병사들의 훈련을 둘러보던 중 한 소년병과 그의 방패에 시선을 멈추었다. 용맹을 상징하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당시 병사들은 방패에 무섭고 이상한 짐승의 형상을 그려 새기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 소년병의 방패에는 한시가 새겨져 있었다.

나라의 근심은 신하의 근심이오(國患臣之患)

어버이의 걱정은 자식의 걱정이니(親憂子所憂)

어버이를 대신하여 국은에 보답하면(代親以報國)

충성과 효도를 한 번에 닦는 것이리(忠孝可雙修)

 

조충은 연유를 묻자 그 소년병은 자신의 이름이 김지대이고 연세가 많은 아버지는 가정을 돌봐야하므로 대신 자신이 자원하였으며, 나라를 위하는 일에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김지대는 장성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진도에 갔을 때 만전한테는 통지라는 한 하인이 있었다. 주인을 대신하여 부리는 행패가 지나쳐 원성을 샀다. 바로 그곳에 김지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김지대는 부러 찾아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채 그와 담소를 나누었다. 그래서 만전은 며칠 후 자신의 수족과 같은 종 통지를 김지대에게 보내었다. 내심 벼르고 있던 김지대가 갑자기 호통을 치며 “저놈을 당당 잡아 묶어라.”라고 하니, 통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그를 강물속에 빠뜨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뭇사람들은 후환이 두렵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만전일당은 김지대의 예상치 못한 기세에 일단 몸을 사렸다. 그래서 한 동안 이 마을에서는 만전일당의 행패를 볼 수 없었다.

최씨 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진도에 있었음을 일러주는 기록은 조선 영조 때의 진도 사람 김몽규(金夢奎)가 지은 『옥주지(沃州誌)』(1761)에 보이는 최충헌의 손자이자 최우의 아들이었던 최항이 진도 용장사에 머물면서 전횡을 하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용장사는 고려실록의 사고(남해 창성현으로부터)가 옮겨질 계획이 있었던 곳이며, 대규모 불경 간행도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현재 의신면 사천리에는 주민들간에 ‘사고지’라는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이런 기록으로 봐서 용장사가 있는 진도는 무신정권과 오랜 인연이 있었으며, 몽골세력에 맞서 전투태세를 갖추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전라·경상의 해안과 남해·창선·거제 등의 30여 개 섬을 장악하고, 독자적으로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는 등 명실상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몽고에 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용장사가 처음 세워진 때는 고려전기 고왕(高王) 때라고 한다. 고려 태조 때의 후진국(後晋國) 고왕[936~943]으로 고려 전기에 창건된 절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용장사를 추측해본다.

“최우(崔瑀)의 서자인 만종(萬宗.화순 쌍봉사)과 만전(萬全)이 무뢰배를 승려로 만들어 고리대금업을 시작하고 백성을 착취하였다. (중략) 만전이 일찍이 진도의 한 절[珍島一寺]에서 통지(通知)란 부하와 함께 심한 횡포를 부렸는데 안찰사 김지대(金之垈)가 그 절에 이르자 만전이 여러 가지 청탁을 했다.”

1985년에 나온 「진도용장성지표조사보고서(珍島龍藏城地表調査報告書)」에 따르면 용장성지는 258만 평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조사되었다. 이곳에서 조사된 건물지 유구 가운데 초석의 형식 등으로 보아 삼별초군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법당은 최근에 지은 것으로 이곳에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삼존석불이 있다.

▶최씨정권이 고려를 통치하고 조정의 기강이 문란했던 시절, 김지대와 같은 청백리 관리라도 있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는 원종7년(1226) 생을 마감하니, 조정 대신들도 그의 덕을 기려 영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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