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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드라마가 아니다
역사는 드라마가 아니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09.0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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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순절묘역과 왜덕산을 기억하라!

우리에겐 자랑스런 역사가 있다. 울돌목 진도대교는 축제의 현장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정유재란 전쟁 당시 이곳은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 곳이다. 아직도 그 성난 가슴들이 벌떡거리는 소용돌이가 힘차게 흘러간다. 하얀 거품의 분노와 갈등. 이순신은 홀로 중얼거렸다. “이 두려움을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가 상상하고 추정하는 전투는 매우 도식적이다. 감정이입이 자유롭다. 그러나 딩사자들은 온 머리칼이 곤두서고 천근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르기도 한다.

명량대첩은 말 그대로 ‘통쾌할사’ 해전사상 전무후무의 기적적인 승리였다. 명량해로에 자진해 몰려든 호남과 진도사람들은 나도나도 얼싸안고 만세를 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여기까지가 ‘명량’이다. 드라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강강술래와 쇠사슬작전, 일자진의 비장함과 용맹함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장판교에 홀로 우뚝 선 장비와 같은 일부당천의 사내들이 판옥선에 오른 명량대첩. 전라남도는 해마다 해남군과 진도군 공동으로 이 역사를 바탕으로 가을이 되면 성대한 축제를 열고 있다. 올 해는 더 많은 국민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진도타워에서 내려다보는 대승첩의 현장은 스펙타클한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다. “NO아베, NO제팬”의 현수막이 진도대교에 일자진을 칠 것이다.

전복처럼 달라붙는 적선들 안택선. 이미 전일 밤 벽파진에서 신인을 만난 현몽에서 승리의 비책을 감지한 이충무공은 추호의 흔들림없이 대장선을 적진으로 돌격전진한다. 이미 망배례를 거부한 그는 임금이고 나발이고 오직 조국과 백성의 안위, 50대 장부의 불타는 호승심도 작동했을까. 하늘이 내린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귀선(거북선) 한 척도 없는 상황에서도 바둑판의 수를 면밀하게 헤아리듯 이 바다의 흐름과 지형지세 무엇보다도 전투에 임하는 수군 병사들의 장군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일치단결의 호연한 지기가 울돌울돌 솟구치;고 있었을 것이다. 숭어처럼 튀어오를 왜군들을 쇠갈퀴로 한 놈도 놓치지 않고 아가미를 찔러 내동댕이칠 것이다.

12대 133척. 중과부적은 단순한 숫자놀음에 빠진 자들의 자기 함정일 뿐이다. 저 많은 피난민 의병(疑兵)들이 주시하고 있는 라이브 공연이다. 잠실경기장에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든 관중들 앞에서 펼치는 한일전이다. 안위와 김억추가 치고빠지는 전술을 펴는 동안 손흥민처럼 오버랩 적진으로 진천뢰가 되어 대장선이 최대의 주력으로 내닫는다. 망금산 팔부능선에서 강강술래가 시작된다. 구루시마가 쓰러진다. 세또 내해의 수달 미치후사의 시신이 올려져 목이 잘린다. 앞다투어 도망을 치는 왜군과 적선들. ‘거기까지만 거기까지만’ 강강술래 사이사이 송가인의 애닲은 노래소리가 목덜미를 더욱 서늘하게 만든다.

 

1597년 9월 28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교토에 무덤 하나를 세웠다. 도요토미의 포악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낸 무덤이었다. 무덤에는 조선에서 보내진 코 10만 여 개가 묻혔다. 조선군사와 백성들의 시체에서 잘라낸 코들이었다. 그 코들 중 일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베어낸 것도 포함돼 있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 것도 부지기수였다. 이들은 스스로도 너무 야만적이라 생각되어 이총(귀무덤)이라 불렀다.

다시 진도. 정유재란과 깊은 연관을 갖는 떼무덤이 두 개 진도에 전해온다. 우연하게도 이 두 무덤분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동일인이다. 진도사람이다. 바로 박주언 현 진도문화원장이다. 물론 박문규 전 진도무화원장은 펄쩍 뛴다. ‘와닥밭’이라고 반박한다. 이 무덤 또한 정유재란 명량대첩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무덤의 이름은 정유재란 순절묘역과 왜덕산이다. 하나는 고군면 도평리 산에 있고 또 하나는 고군면 내동(내산리. 고 이기수씨가살던 마을)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명량대첩이 조선수군의 원사이드한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에는 분명한 펙트가 존재한다. 일본군이라고 그저 당하기만 하지 않았다. 벽파마을에 있는 1958년에 세운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비문 내용에 보변 이 전투에 참여한 진도사람들은 부자간에 목숨을 잃은 사례가 분명하게 새겨있다. 조응량과 그 아들 조명신, 박후령과 그 아들 인복이며 양응지 그 조카 계원 등이다. 노산은 비문에 “이는 진실로 진도민의 자랑이로다.”라고 밝혔다.

왜덕산은 그 진위와 관련없이 조성된 경위가 주목을 끌게 한다. 당시 전쟁에서 죽은 일본수군 시신들이 황조 앞바다에서 내동 마산 마을 앞바다로 밀려왔다고 한다. 이를 마을 주민들이 수습하여 매장하여 “왜군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뜻으로 왜덕산이라 불렀다고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라지만 조선의 사람들 코를 사망자와 산자를 막론하고 닥치는대로 베어 일본 교토로 보내 아예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문화적 차이가 크다고 볼 수 있다. 한 쪽은 전쟁승리기념물로 또 한 쪽에서는 해양문화의 관습에 따라 장사를 치러주는 예를 다했으니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그저 승리에 도취해 강강술래만 할 것이 아니라 도평리 순절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왜덕산도 둘러볼 일이다. 진도향교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진도읍 읍성 뒤편에 진도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진도향교에 왜병이 쳐들어왔을때 유림 김희남이 피난하면서 명륜당 기둥에 "천하에 어찌 공자의 도가 없겠는가 (天下豈無夫子道)"라는 글귀를 남기고 떠나자 그 뒤 왜병들이 향교에 침입하여 불태우려다 이 글귀를 보고 경탄하여 그 글귀 옆에 "이 곳에도 충렬의 선비가 있구나(此地亦有忠烈士)"라는 글로 화답하고 후퇴했다는 옛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조선수군이 신안 당사도를 거쳐 부안쪽으로 후퇴하는 동안 일본군들은 보복을 위해 광분하여 죄없는 백성들까지 무참하게 살육하였으니 진도군민들의 슬픔은 하늘에 닿을 듯 하였으리라. 왜 진도에 스스로 자기 정화의 엄숙한 의례가 들어있는 진도씻김굿이 전해오는 이유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유난히도 구슬픈 진도만가가 명량대첩축제 이틀째 날 진도대교를 오고가는 모습은 말 그대로 거대한 질베 위에 극락왕생 길닦음을 하는 것이다.

명량대첩축제가 진정한 동양 아니 세계의 평화축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일본 후손들이 진도의 순절묘역과 왜덕산을 찾아 진실한 속죄의 참배를 올려야 하며 우리 스스로도 결코 잊지 않을 때 진정한 용서와 상생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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