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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유배문화실마저 없어졌다니…
진도 유배문화실마저 없어졌다니…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02.1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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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진도는 유배지·유배자가 문화요 역사”

운림산방.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곳으로, 진도 그림의 뿌리이자 한국 남화의 고향이다. 이곳 진도역사관 안에 유배문화실이 있었는데, 최근 없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진도는 오래 전 부터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많은 사람이 진도와 접도(금갑도)로 유배를 왔다.

 ‘유배자가 너무 많아 먹여 살리느라 굶어 죽을 판이니 제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 조선 영조 때 전라감사가 조정에 간곡하게 건의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귀양을 왔던 곳이 진도다.

 진도에서 19년이나 유배를 살았다. 훗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이 되었다. 주자의 나라에서 양명학의 산이 되었다.

 소재 노수신이다.

 방 하나 얻어 연 서당이 학생 백 명이 넘는 학교가 되었다. 은파유필이라는 유배 일기를 썼다. 강강술래 가사도 채록했다. 진도의 교육 문화 예술 발전의 화수분이 되었다. 진도의 마지막 유배자, 무정 정만조다.

 진도에는 유배자들을 기억할 수 있는 흔적들이 거의 없다.

 운림산방 진도역사관 안에 유배문화실이 있었다.

 초라한 전시물 때문에 실망스러웠는데 최근에 전화해 보니 그 유배문화실마저 없어졌단다.

 부족하면 확대 보강하는 것이 상식일 것 같은데 아예 없애 버렸다고 한다.

 이제 진도에 가도 진도의 유배와 유배문화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진도문화원에 가봐도 유배에 관한 이렇다할 간행물이나 자료가 없었다.

 진도문화원에도 유배 자료 없어

 남해군은 거창하게 유배문학관을 지었다.

 서포 김만중이 유배 살았던 남해 노도에는 김만중 문학관과 문학공원을 만들었다 . 김만중 문학상도 만들어 매년 시행하고 있다.

 거제시는 1400페이지가 넘는 거제도유배고전문학총서를 번역 발간했다.

 포항시는 장기읍성을 복원하고 그 안에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을 만들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 살았던 다산 초당이나 동문 밖 주막집, 사의재…. 사람들이 강진을 찾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거제는 우암 송시열이 유배를 살았던 자리에 그를 기리는 서원을 세웠다. 반곡서원이다.

 장흥은 유배 살았던 노봉 민정중을 기리는 서원을 세웠다. 연곡서원이다.

 고흥은 나로도에 유배 살다 사약을 받은 한포재 이 건명을 기리는 서원을 세웠다. 덕양서원이다.

 진도 또한 진도개화지조(珍島開化之祖)라 추앙 받는 소재 노수신을 기리는 서원을 세웠다. 봉암서원이다.

 이들 서원은 190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되었다. 그러나 뒤에 다시 복설되었다.

 오로지 하나. 진도의 봉암서원만은 끝내 복설되지 못했다.

 그 터 자리를 알려주는 표석 하나조차 세우지 못했다.

 절해고도 최고 문화 향유, 유배자들 기여

 이래서는 안된다.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진도는 이러면 안된다. 진도만은 이 유배자들을 기억해야 한다. 절해고도, 그렇게 멀고 궁벽했던 진도가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유배자들의 기여가 컸다.

 문학(글), 서예(글씨), 미술(그림), 음악(소리), 무용(춤). 진도 글씨의 소전 손재형, 진도 소리 박종기에 그림의 의재 허백련, 최근의 송가인 트롯 열풍에 이르기 까지 예향 진도는 이들 유배자들에게 빚진 게 많다.

 진도에서 유배자는 그저 지나가는 손님이 아니다. 유배지, 유배자가 곧 진도의 문화요 역사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새삼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히는 아침이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소한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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