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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또랑광대가 그립다
나의 또랑광대가 그립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09.0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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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랑새비를 아십니까?”

흔히 또랑치고 가재잡는다고 한다. 일석이조를 한다는 뜻이다. 한 여름철의 전통 피서놀이도 이젠 보기 힘들게 되었다.

또랑새비가 사는 작은 물고랑을 흔히 또랑이라 부른다. 요즘은 농수로 개선사업으로 농로포장을 하면서 또랑들은 시멘으로 발라 복개되어 토종 물고기 등이 다 사라졌다. 새비, 고둥, 가재 미꾸라지 물방개들 정겨운 농촌 생태계가 파괴되고 정작 농사를 지어야 할 사람들도 산으로 가 돌아오지 않는다. 징검새비나 고상스레 토하라고 하는 민물새우는 저수지로 갔다.

동네마다 익살을 잘 하고 노래 한 대목도 춤도 제 멋에 추던 또랑광대가 있었다. 어찌 보면 동네소릿꾼 역할을 자청하고 부르던 말든 잔치마당에서는 시키지 않아도 흥을 돋아 술과 푸짐한 안줏상이 절로 차려나왔다.

홍림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안 보면 궁금하고 어디를 가도 보릿대춤으로 장단을 맞추며 소리동무 추임새에 제법 귀명창 노릇도 했다. 막걸리 두어잔에 얼굴이 흥그레하니 상가집이든 노름판이든 안 끼는 곳이 없었다. 홍림이에겐 또 다른 재주가 있었다. 생선 손질하는 놀림이 남달랐다. 뚝뚝 썰어도 맛이 달랐다. 수 년간 외항선을 타며 주방실에서 역힌 솜씨다. 맑게 우러난 그 칼칼한 맛.

천하잡놈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소포 이장도 하고 민속문화마을 전수관장 붙박이 김병철은 자기가 자기를 천하잡놈이라 자처하는 사람이다. 둘은 데칼코머니처럼 닮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닮은꼴이 하나도 없다. 추석절 앞둔 떫은 감이다. 김병철은 소포에서 인류학자이자 진도 하사미 연구가인 전경수 교수가 칠순잔치 담연을 할 때 “세상살이 참 고되어서 녹진다리(진도대교)에 가서 아주 인생 정리를 하러 갔다가도 다리 밑에서 돌아오고 돌아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여. 그라제 이 그걸 어디 풀어버려야 된께 노래하고 싶은 것은 해부러야 해라”라며 세상살이 해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라제 쉬운 것은 인생이 아녀.

소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지만 여러 구경꾼들 앞에 내지르기 앞서 숨을 고르는데 나름대로 공을 들인다. 이 내공력을 쌓으려면 때로 그 ‘천하잡놈 잡년’노릇도 해야 한다.

홍림이 그가 그리우면 단원 김홍도의 화첩을 펼쳐보면 아쉬움을 좀 달랠 수 있으려나. 씻김굿 지청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북과 장구 젓대 피리 아쟁이 이우러진 판에 홀로 흥에 젖어 춤추는 총각 무동(舞童). 이 풍속화처럼 그에게는 산수배경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이런저런 구도에 끌려 그림 속으로, 구경꾼 속으로 숨지않고 그림 밖으로 뛰쳐나온 우리시대의 또랑광대. 그래도 오대양 고래 등살에 견디던 이력을 자랑한다.

홍림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81호 다시래기 전수이수자로 사당 역할을 했다. 새내기를 꼬다 막 털고 일어선 손, 털이 부숭부숭하고 큰 손바닥에 침을 퉤 뱉으고 한 판 놀아보자며 바짓가랭이 하나를 걷어 올리며 판에 들어가면 천하일색 광대중에 광대였다. 다시래기 민속놀이는 작고한 김귀봉(임회면 송정리)씨에게서 배웠지만 춤사위는 언제부터 누구 어깨너머로 배웠는지 몰라도 듬직한 뱃심에다 손놀림이 제법이어서 마당가에 모인 동네아낙들과 잘도 어울리곤 했다. 몇 마지기도 안되는 농사는 진작 뒤로 제쳐놓은지 오래였지만 농민운동에는 고추 수매투쟁 천주교 카농시절부터 앞장서기를 즐겨했다. 그 모든 게 즐거움이었다. 싸움도 사랑도 술판도 군청앞 시위도 구호소리도 징긍징글하면서도 얼척없이 달라붙는 귄있는 생의 대목대목들이었다. 밖으로 나돌때는 꼭 홍림이와 함께 붙어 진도대교를 넘고 낮에는 대포집, 해질 무렵이면 팔도 광대들을 수소문해 어울리기를 즐겼다. 도시는 도시대로 또랑물이 흐르기 마련이다. 하늘에 뜨는 별처럼 달처럼 천하를 비추며 즐겼다.

 

지산면 금노마을은 본디 소내동으로 불렸다.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땍땍이’라 불리는 부인은 그래도 처녀적에 인지리 친정집이 동네에서 잘 나가는 ‘차씨네 애기씨’로 자랐다며 아주 내놓고 게으름을 피웠다. 술도 한 사발이라도 더 마실라고 환장을 해댔다. 그당시 아내가 조도 보건진료소에서 근무해 수시로 내가 불러 들판 조립식 우리집에서 같이 날새기로 마시기도 했다. 걱정없는 시절이었다. 김정호선생이 진도문화원장을 하던 때였다. 문화원 일도 거들었지만 제대로 몫을 챙길만한 자리는 없었다. 문화답사에 끼어 술밥추렴하면 하루가 갔다.

다시래기판도 메뚜기 한 철과 같아 초청공연에 나가면 여비나 받아 그때 그때 쓰고나면 그만이었다. 작은 딸은 충남 서천 청년과 결혼햤다. 그날 가서 소곡주를 마신 듯하다. 첫째 딸은 진도 옥대청년 서방하고 광주 방림다리에서 LA 갈비집을 했다. 이리 보면 세상에 나와 나보다는 그런대로 사람도리는 한 편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살라는 식이었다.

홍림이는 놀이마당판에서는 잘도 어울렸지만 삶에서는 거래나 흥정이 영 서툴렀다. 장어 기른다고 육상 둠벙을 팠다가 곱도 안 빼고 키우다 금방 거덜을 냈다. 그러나 저러나 닷마다 열리는 조금리 오일장은 또 하나의 무대였다. 괴기장시치고 홍림이 모르는 아짐들이 없었다. 보리나물이나 갯고둥을 파는 팔순 함매도 육자배기 한 대목을 저도모르게 풀어놓고 함께 얼척없이 웃고는 했다. 그게 홍림이었다. 즉석 인터뷰도 잘했다. 진도 땅끝 보전 갈두에서 열린 전복축제 때도 한 몫 잡는다고 장사를 했지만 뒤로는 밑지고 말았다. 나도 품값도 못 건졌다.

그래도 평생(그 생은 평생이 되었다) 여자들에게 한 눈을 팔지 않았다. 허튼 수작을 절대 부리지 않았다. 듬직한 몸 틀이 좋은 얼굴이라 옷만 제대로 얹히면 누가봐도 장군감이었다.

홍림이는 공연무대의 주인공은 결코 아니었다. 딱히 차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오는 것도 어느 정도 판이 오를 즈음에야 눈에 띄지 않게 어느새 어울려 얼근한 맨가죽 탈을 쓴 광대가 된다. 역시 그는 또랑광대였다. 알밴 새비가 되어 통통하니 등허리 휘었다 굽어 가재발같은 손을 부채살 펴듯 사람들의 흥을 불러모은다. 즉흥성이 강한 다시래기라 대본을 뺨치는 더늠은 늘 정해진 주인공의 몫이었지만 홍림이는 창이 아닌 판의 변화를 자연스레 이끄는 아니라와 추임새에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여럿이 어우러지는 판이라 한 사람 없어도 그만인 듯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의 몸사위는 일종의 그림으로 치자면 큰 밑그림 드로잉이다. 공동체의 힘 한솥밥을 섞는 주걱이다. 죽림에 살던 김철웅이도 다시래기 보존회원에 감칠맛은 좀 떨어지지만 엄연히 또랑광대 계보를 갖는다. 그는 사군자를 비롯 수묵화 그림을 공부했다. 머한다고 농민운동 한답시고 따라다니다 시앙골에 키우던 양식고기를 사료도 못 대고 다 굶겨 죽이고 진도를 떴다. 요즘에는 낮가죽 가림도 안한다.

며칠 전에 진도에서 만났지만 서로 홍림이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인천에서 산다. 다들 그렇게 무엇 오르고자하는 그 물살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홍림이가 수원에서 한 동안 소식을 끊고 그나마 가족 품에서 죽었을 때 연개주점에서 ㅅ뤁작을 하다 마지못해 내가 알려 서울사는 막걸리간첩 출신 장의균이와 함께 조문하도록 주선을 했다. 나도 통장부조를 했다. 내 몫은 고만치였다. 광주에 계시는 김정호선생에게도 알렸다. 이도 마지못한 일이었다. 홍림이 형제 집안사람이 진도에 없는 땍땍이네와 자식들은 진도에 올 일이 없어졌다.

홍림이와는 동해바다 독도에도 전남 개발공사 소속 거북배를 타고 간 적이 있었다. 진도북놀이팀(박강열. 이기서 등)과 해남 우수영 강강술래팀이 함께 가 울등도 도동항, 독도 물양장 공연을 펼쳤다. 나는 그와 함께 지역신문사 취재원이었다. 거기서도 홍림이는 또랑광대 역할이었다. 그 때만 해도 서로 아버지가 살아계셨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마람장을 엮은 듯 한 사이였다. 언젠가는 홍림이와 함께 느닷없이 지리산 구례 사자평에 올라 조촐한 출판기념회 겸사 김해자 시인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새기도 했다. 마고할매 마른 사타구니 까지 올라간 또랑새비가 갈하음수에 목말라 담근술을 많이 비웠다.

그에게도 잠시 마귀가 들었다. 정치바람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물찾는 또랑새비처럼 파닥거렸다. 최재천 후보에게 너무 집착해 아예 서울로 가 뒤치다꺼리를 한다며 나를 앞세워 이것저것을 챙겨 다녀오더니 후보는 떡하니 당선되었지만 그는 더 궁색해진 듯했다. 어이가 없었다. 나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아내는 노르웨이행을 고수하며 인천에서 별거중이었다. 무엇에 자꾸 쫓기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거가 끝나면 진도씻김굿처럼 하얀 지전만 천지간에 흩날릴 뿐임을 왜 몰랐을까.

또랑들은 이제 익명의 바람이 부는 거리 인심마르듯 찾기 힘든 농촌이지만 그 사연들은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으로 아직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작년에 강준섭 명인의 수많은 유랑광대 창극 대본을 두툼하니 모아 진도문화원(원장 박정석)에서 엮어냈다. 다시래기도 시대의 굴곡을 함께 한다. 판소리도 영화 서편제가 단일극장에서 한국 최초로 100만 명 관객 돌파로 해 크게 각광을 받았고 위상도 높아졌다. 요즘에는 진도출신 국악인 이소연이 실력을 갖춘 신성으로 떠오른다. 송가인과 예술창작과 동문이란다. 또 다른 엿장수 광대 조오환씨 딸 조아라와 함께. 진도에서는 조오환씨를 빼놓고는 또랑광대를 거들먹거릴 수가 없다. 만년필 장사 예능도 독보적이다. 조도닻배노래 무형문화재이다.

 

홍림이형은 여전히 어디선가 이젠 또랑광대의 틀에 구애받지 않은 춤사위를 엉덩이로 그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는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문상 다녀온 철웅이는 수원 어디 납골당에 모셨다고 한다. 벌써 작년 봄이었다. 진도 금노마을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걸어다니는 걸망산 설화도, 애기밴 여인의 놀란 소리도 다 그쳤다. 황토 흙벽이 내려앉는 그 집도 이미 십 여년 전에 경매로 넘어갔었다. 다시래기는 진도에서 수요일 저녁 무형문화재 전수관에서 ‘진수성찬’ 공연에서 운 때가 맞으면 볼 수가 있다. 눈이 가물가물해지면 홍림이 그림자가걸망산처럼 움직이는 듯 하다. 곧 추석이 온다. 하루하루 달이 차 오른다. 실룩거리는 홍림이성 궁댕이가 떠오른다. 나는 간경화로 술을 끊었다. 몸이 허락되면 한가위 전에 아버님 어머님이 누워계신 대전 현충원에 다녀올 계획이다.(박남인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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