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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덕산’ 유감
 ‘왜덕산’ 유감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02.2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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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영 (한신대학교 한국사회학과 명예교수)

반세기 동안 역사를 연구해 온 필자가 2020년 말 이래 고향인 진도에 돌아와서 살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진도의 역사를 말하고 쓰는 사람들(이른바 향토사학자)이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얘기(전설)나 이름(성명, 지명 등)을 사실(事實)의 여부(與否)를 따지지 않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얘기하고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역사학의 시조(始祖)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가 ‘역사는 전해 들은 것(傳聞)을 쓰는 것이다’라고 했던 ‘역사’를 지금까지도 붙들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실(史實)•사적(史蹟)’을 새로 만들기까지 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적(史蹟)이 2003년 이래, 특히 작년 11월 이후 세간에 논란이 일고 있는 ‘왜덕산’과 거기에 있다는 일본 수군의 공동무덤이다.

「창세기」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쓰여 있다. 근래의 유전학자•언어학자들은 ‘인간은 18만 년 전부터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농경(農耕) 생활을 하고, 집단을 이루면서 같은 말을 하는 언어족(言語族)을 형성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 수가 많아지고, 흩어져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면서부터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그림(벽화)을 그리고, 이내 문자를 발명해서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1세기부터 한자(갑골문자)를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잘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세종 임금 때에 비로소 한글을 만들었다. 물론 한반도에서는 고대시대부터 왕실이나 지식인들은 이미 중국의 한자를 익혀서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인들, 즉 ‘사관(史官)’들은 삼국시대부터 대한제국 말기(한말)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해 왔다. 지금 남아있는 역사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시대의 다음 시대인 고려시대의 김부식(金富軾, 1075~1151) 등이 고려 인종 23년(1145)에 편찬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그런데 역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史實)의 사실(事實) 여부를 놓고 논쟁중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의 첫 번째 의미는 ‘과거의 일(事) 자체’를 말한다. 여기서 ‘일(事)’은 ‘자연의 모든 현상, 그리고 사람, 혹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의식과 지식)을 표출한 말과 글, 그리고 행위 등’으로 정의된다. 두 번째 의미는 ‘과거의 일(事)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서 극히 일부의 ‘기록된 일(史實)’(이 ‘史實’들을 모아서 편찬한 것이 ‘역사서(歷史書)’이다)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삼국사기』를 보고 읽으면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것들 가운데서 극히 ‘일부의 기록된 일(史實)’만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기록된 일(史實)’이 과거에 ‘일어난 일(事)’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뒤 시기의 사관(史官)들이나 기록자들이 원천적으로 과거의 일들을 모두 기록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마다 달리 기록했기 때문이다. 지금 진도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내동리 동남쪽의 ‘산 162’의 산(1939년 7월 이래 소유주는 조규선•조규옥•조규정이다)의 명칭이 1597년 정유재란 전후에 무엇이었는지를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산은 정유재란으로부터 350여 년이 지나서 발간된 『창녕조씨정언공파세보昌寧曺氏正言公派世譜 全』(1922년)에 ‘臥德山’으로 기재된 이후 『갑인보甲寅譜 창녕조씨시중공파보昌寧曺氏侍中公派譜 丁編』(1974)에는 ‘倭德山’•‘凡德山’, 『창녕조씨정언공파세보昌寧曺氏正言公派世譜 全』(1992년)에는 ‘臥德山’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즉 ‘산 162’의 산은 하나인데 여러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세 번째 의미는 ‘해석(解釋)’이다. 즉 역사학자나 비(非)역사학자들이라도 그들은 ‘사실(史實)을 사실(事實)’로 간주하면서 자기의 사관(史觀)이나 의도에 따라 그 ‘사실’(史實)을 이해하거나 설명한다. 즉 그 ‘사실’(史實)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만큼이나 다양한 논문이나 역사책을 서술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역사학자들은 새삼 ‘역사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 말하기•쓰기의 상대성’을 극복하고 ‘올바른 역사’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史實)을 사실(事實)로 환원시킬 것과 ‘사가들마다 가지고 있는 사관(史觀)을 연구해야 한다’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제 앞의 여러 족보에 기재되었던 ‘산 162’의 산 이름 가운데서 ‘왜덕산’(倭德山)의 의미를 살펴보자. 『창녕조씨정언공파세보昌寧曺氏正言公派世譜 全』(1992년)에 ‘산 162’의 산의 명칭이 ‘臥德山’으로 기재된 이후 그 존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2003년 ‘삼별초전적지탑사단’(박문규 진도문화원 원장, 이진희 군의원, 박병훈 전 문화원장, 박주언 현 문화원장)의 박주언이 당시 내동리 이장 이기수(李基洙)의 말(‘명량해전 때 전사한 일본 수군의 시신들이 내동리 앞바다로 떠내려오자 인근 마을 사람들이 그 시신들을 거두어서 묻어줌으로써 큰 덕을 베풀었다고 해서 ‘왜덕산’이라고 했다’)을 듣고 그 산을 ‘왜덕산’으로 지칭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마추어 역사학자라도 그 산의 실체를 확인하려고 할 때는 여러 사람의 구술(口述)을 크로스체크하거나 발굴해서 시신과 유물들을 분석하는 법인데 박주언은 그렇지 않고 마치 ‘월척을 건 낚시꾼’(『임진•정유왜란과 진도, 진도민』 164쪽)의 들뜬 기분으로 이기수의 말만을 확신해 버렸다. 이로써 ‘산 162’의 산 이름은 이기수의 해석대로 ‘왜덕산’(倭德山)이 되어 버렸고, 일본 수군들의 원혼(冤魂)들은 구천(九天)을 헤매면서 위로받고 싶어 하고 있다. 이후 ‘왜덕산’의 존재와 그 의미는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최근에 차남준(2001~2003년 당시 내동리 이장)은 그 무렵 이기수(2012년에 사망)에게 그의 ‘왜덕산 발언’을 문제 삼고 항의하자 그는 ‘일이 커져 버렸다. 이제 와서 그 발언을 부정하게 되면 자기는 감옥 간다고 말했다’라고 증언했다. 2006년 8월 15일 광복절에 일본인들(四國 愛媛 출신으로 자칭 수군의 후손들과 왜군을 지휘했던 來島道總 현창사업회 임원, 그리고 수도대 학생들)은 내동리를 방문해서 ‘왜덕산’의 묘들 앞에서 위령제까지 지냈다. 이후 일본인들의 방문과 위령제는 계속되었다. 그럴수록 ‘왜덕산’의 의미는 침소봉대(針小棒大)되었다. 그리고 2022년 9월 23~24일에 진도문화원(왜덕산보존위원회)(원장 박주언)은 진도군청의 후원하에 한국•일본의 정계•학계의 유명인들을 초청하여 「제 1회 왜덕산 국제심포에스타」를 개최하고 ‘왜덕산’의 일본 수군 공동무덤 앞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그리고 ‘한일 간의 화해와 인류평화를 추구하는 진도의 왜덕산 정신에 동의하는 왜덕산 사람들’(『진도문화』 2021 가을 제107호, 3쪽)은 앞으로도 계속 교토 코무덤과 왜덕산 공동무덤에 위령제를 지냄으로써 한일 간의 화해와 세계평화를 이룩하자고 했다. 그런데 박주언 원장은 그 행사를 준비하면서부터 진도문화원 안으로부터, 그리고 많은 군민들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그것은 ‘일본은 지난 두 번의 침탈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진정성 있는 반성이나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고 있는데 위령제를 지내준다는 일이 말이 되는가’라는 것이었다. 행사 이후에 그 파장도 만만치 않았다. 진도문화원 주변의 대부분의 인사들은 박주언 원장을 친일파로 의심까지 하고 있고, 국민의 혈세를 유용하고 있는 진도군청을 성토하고 있다.

이에 글을 맺으면서 필자는 진도군청에 고고학자들의 ‘왜덕산 일본 수군 공동무덤’(가칭) 발굴을 제안한다. 이는 그것을 사적(史蹟)으로 지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이다. 지금은 고고학의 발굴기술과 피장자와 부장 부품에 대한 분석 방법이 발달해서 피장자의 실체와 무덤의 생성 시기를 쉬이 밝힐 수 있다. 그런 다음에야 그것의 사적 지정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현재 ‘왜덕산’과 관련해서 일고 있는 모든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2월 17일 이세영(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진도중학교 23회 졸업, 현재 고군면 도론리 거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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