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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反日)사회운동사(1)
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反日)사회운동사(1)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03.2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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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도 소작농민들의 반(反)지주계급 투쟁사

진도군에서 소작인회가 창립된 것은 1924년 7월 15일이었다. 그리고 제1회 정기총회(1924. 8. 15)에서 조선노농총동맹에 가맹의 건, 순회 강연의 건, 임원 보결 및 임원 선임 건 등을 의결하기에 앞서 경과보고가 있었는데 거기서 하나의 ‘특이한 일’이 보고되었다.1)

진도군 임회면 용호리 조병수, 진도면 성내리 韓致敎, 고군면 석현리 金馨瑀씨 등 대지주들은 소작인회 창립 당시에 결의한 소작료 4割에 준하여 실행하겠다고 소작회 사무소를 방문하고 성명한 일이 있었다.

즉, 이처럼 조병수 등이 소작료는 4할 예에 준하여 실행하겠다고 성명한 일이 ‘특이한 일’이었던 것은 이미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흥업주식회사, 일본인 지주, 그밖의 악(惡)지주들(이하 지주계급)은 매년 6할~8할의 소작료를 확취(攫取)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4년 당시 진도의 상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2)

(1) 지주계급은 전 경지면적의 4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2) 진도군의 농가는 1만여 호(인구 5만여)였는데, 그 가운데 자작농은 1,500호, 소작농은 8,500호이었다.

(3) 지주계급은 매년 8할~6할의 소작료를 수취했다.

(4) 지주계급은 지방군청의 양해 아래 교제 단절, 벌금 등으로 지주계급의 진영을 단속·결속하는 한편, 소작인들을 고발하고 그들의 수확물을 차압했으며, 소작인회에서의 탈회, 혹은 반역을 강제 또는 회유함으로써 무산자의 보조를 교란했다. 그리고 지주계급은 조직적인 폭력군을 지휘하여 농작물의 강제 취득을 자행했고, 쟁의 조건으로 항의하는 소작인들을 난타하여 자못 약탈과 살벌(殺伐)을 겸행(兼行)했다.

(5) 경찰 당국은 지주계급을 편들고 옹호했으며, 소작인들에게는 냉혹한 폭언을 남발하면서 처벌하는 데에 급급했다.

1) 「동아일보」, 1924. 8. 22. “전남 진도군 내 진도소작인회는 7월 15일에 창립되었다. 그것은 일본 및 경성에 일시 유학했다가 귀향한 일부 청년이…기독교 신자, 만세소요주의 인물과 함께 조직했는데(조선총독부 관방문서과 『朝鮮の群衆』, 28~29쪽) 창립 당시부터 인근의 목포·완도·무안·광주 등지의 사회운동세력과 연결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인 지주측이 소작인회의 주장(소작료 4할)을 수용하겠다는 태도를 표명하는 등 초기의 발전은 순조로왔다(「동아일보」, 1924. 8. 22). 그리하여 1천명에 불과하던 소작인회의 회원은 5천명 선으로 늘어났다. 8월 15일에 제1회 정기총회를 열었는데, 정각 전부터 운집한 회원은 천여 명에 달하였고, 광주 목포 해남 완도 등지로서 多數來賓이 있어서 稀有한 성황 중에 아래 사항을 결의하였으며, 경과보고 중에 특이한 일은 진도군 임회면 용호리 조병수 동군 진도면 성내리 한치교 동군 고군면 석현리 金馨瑀 세 씨는 동군 대지주로서 소작인회 창립 당시에 결의한 소작료 4割 例에 준하야 실행하겠다고 소작회를 방문하고 성명한 일이라 하며 내빈축사가 있은 즉 만세삼창으로 폐회하였다.”

2) 「사설 진도사건에 대하여」(「조선일보」, 1924. 12. 7)(압수당한 사설로서 『민세안재홍전집』 1권에 수록된 것임).

또한 진도 지주들로 결성된 지주회(회원 50명, 이가운데 일본인 7명)는 1924년 8월부터 소작인회의 조직적인 쟁의에 대하여 군청의 비호 아래 ‘공영회’(共營會)를 조직하고 군수와 함께 ‘오할제유고문’(五割制諭告文)을 일방적으로 선포하면서 소작인들을 압박하는 한편, 경찰을 동원하여 그들의 수확물을 차압하거나 강탈했고, 심지어는 소작인들의 집에 침입하여 폭행을 자행하기도 했다.3) 그리하여 ‘진도 일경(一境)은 인심이 전쟁 때나 다름없었으며 경찰서장은 노골적으로 지주단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원망이 자자했다.4)
 

1925년 초부터 지주회는 소작인회와 충돌이 잦은 가운데 그 횡포가 날로 심했다. 이를테면 의신면 사천리 강태봉(姜太奉)은 지주 이경욱(李景旭)의 논 11두락을 소작했고 그 총 수확이 구두(舊斗)로 7石3斗이었는데 소작료를 9석 17두로 감정받았다.5) 또 침계리 조용안(曹龍安)은 지주 손병익(孫炳翼)의 논 3승락(升落)을 소작했고 그 총 수확이 구두로 5석이었는데 소작료를 3석 7두로 감정받았다. 침계리 조석순(曹石淳)은 역시 손병익의 논 20두 5승락의 총수확 16석 5두에 대하여 14석 7두로 감정받기도 했다. 특히 손병익은 소작인이 소작료를 바치지 않는다고 의신면 작인 조윤정(曹允正) 외 9인을 경찰서에 고발하기까지 하고 있었다.6) 그리고 지주회의 지주들은 고율의 소작료 징수를 지주회에 위탁했고, 그러자 지주회는 수십 차례 출장하여 ‘이런 놈들이 4할 선동자’라고 하면서 이면차압(裏面差押)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7)

그러나 이런 지주들이 있었는가 하면 ‘양심 있는 지주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지산면 가심동리(가학리·심동리) 서수호(徐洙鎬)와 조도면 가사도리 윤길서(尹吉西) 둘은 지산면에서 받는 소작료가 100여 석씩 되었는데 1925년에 지산면에서 소작 인회가 설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솔선하여 소작인회가 책정한 4할로 소작료를 받겠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소작인 가운데서 특히 곤란한 사람에게는 4할로 가져온 소작료 가운데서 4, 5두씩을 빼서 돌려주기도 했었다.8) 또한 이 외에도 소작인회의 요구대로 4할을 받는 지주들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군내면 나리 최기태(崔基台), 임회면 봉상리 곽장□(郭長□), 목포 복산정 일인(日人) 대목수장(大木守長) 등이 그들이었다.9) 그런데 제1회 소작인회 정기총회(1924. 8. 15)에서 4할제를 실행하겠다고 성명했던 조병수, 한치교, 김형우 등 대지주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흥업주식회사 등의 회사 지주와 지주회의 지주들은 군청의 후원을 업고 경찰을 앞세워서 고율의 소작료를 강탈하는 한편 개개 소작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소작인회의 소작 쟁의는 수그러들지 않고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주계급과 소작인의 싸움은 비단 진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거의 전국적인 것이었다. 이에 일제는 대응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하나가 이른바 ‘자작농창정계획’(自作農創定計劃)이었다. 그것은 ‘농촌의 산업장려와 미풍양성, 그리고 문맹퇴치’를 내걸고 ‘진농회’(振農會)를 조직하게 해서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소작료를 낮추어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었다.

3) 『조선の군중』 19~20쪽, 48쪽. 경찰통계에 따르면 진도의 경우 1924년에 2건의 소작쟁의가 있었는데 그로 인해 검거된 자는 무려 27명에 달하였다. 이것은 전남 여타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지주들의 앞잡이로서 경찰이 소작농민들에 대해 매우 폭력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4) 「조선일보」 1924. 12. 12. 「去去益甚한 珍島地主의 惡行-해결의 빛은 아직 보이지 않고 압박이 심할수록 단결도 굳다」

5)  1920~1930년대 진도에서 논 1단보당 수확량은 6~7석이었다. 

6)  「조선일보」 1925. 1. 27. 「소작료 안 준다고 경찰서에서 위협」

7)  「조선일보」 1925. 1. 15 「진도소작의 실정 집도례(執賭例)가 증명」

8)  「조선일보」 1925. 1. 15 「양심 있는 지주」

9)  「조선일보」 1925. 2. 25. 「각성(覺醒)한 삼지주(三地主)-소작료 4할을 실행한다고 칭송」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농업정책에 호응해서 진도 지주회는 그 후신으로 1925년 1월 16일에 진농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름만 바꾸었을 뿐 그 행태는 이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여전히 소작인회를 무시하고 지주들 측의 이익만 도모했다. 즉 진농회의 지주들은 소작료를 바치지 않는다고 개개 소작인들을 경찰에 고발해서 소작료납입승낙서를 받아냈고,10) 진농회는 사무원과 순사, 그리고 집달리들을 동원해서 수확물과 심지어는 솥, 숟가락, 농우 등을 차압하기도 하였다.11) 그런가 하면 지주회의 앞잡이였던 경찰은 여전히 진농회의 앞잡이로서 소작료 4할제를 의결하려는 소작인회 총회를 ‘4할제는 불온당하다’고 강제로 해산시키고, 소작인 23명을 검거하기도 했다.12) 이에 소작인회는 긴급 총회(1925. 2. 8)를 소집하였다. 이 총회는 회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에 당황한 경찰서 형사들은 의사 진행 중에 개정한 회칙을 압수하고 간부 소진호(蘇鎭浩) 외 4명을 경찰서로 인치(引致)하여 소작료를 5할제로 결정하지 않으면 집회를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또 소작인회관에서는 순사들이 등사판을 압수하고 간부들을 전부 인치하여 5할제로 개정하지 않으면 검속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작인회는 경찰서가 강요하는 5할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폐회해 버렸다.

 

*필자소개: 이세영(李世永)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인문대학, 대학원) 졸업.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현재 고군면 도론리 거주)  

 

10)  「조선일보」 1925. 1. 27. 「소작료 안 준다고 경찰서에서 위협」

11)  「조선일보」 1925. 2. 11. 「곡성창천(哭聲漲天)한 진도-지주단의 소작료 차압으로 일반도민은 물 끓듯하는 중」: ‘지주단(진농회)은 한편으로 총독부 당국에 지세 납부를 연기해 달라고 청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주회 사무원, 순사, 집달리 등을 동원하여 제1일에 침계리에 가서 솥과 숟가락과 농우 등을 차압하니 궁촌이 일시에 전쟁의 수라장으로 변했다. 당일 차압당한 사람은 박표배, 신종희, 박문홍, 박옥배, 조용안, 조용근, 조기숙, 조귀조, 조병헌 등이었다.’ 

12)  「조선일보」 1925. 2. 10. 「작인 23명 검거 진도소작총회 무리 해산」

13)  소진호는 노동대회 준비위원회 동정의 건(1925-4-23), 조선노동총동맹 통문의 건(1925-11-18),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 관한 건(1927-5-17),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 개최상황 및 집회금지에 관한 건(1927-5-30) 등으로 입건·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1930-12-22)과 경성법원(1930-12-22)으로부터 각각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14)  「조선일보」 1925. 2. 14. 「警察署에서 五割制를 主張-소작인은 어디까지든지 사할제를 주장하고 있다-종시강경한 진도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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