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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덕산’ 유감(2)
‘왜덕산’ 유감(2)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04.0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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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덕산’ 유감(2)

이세영(한신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진도문화원장 박주언(이하 박 원장)은 「예향진도신문」 2023년 3월 23일자 2면에 “이세영 교수의 「‘왜덕산’ 유감」에 대하여”라는 글을 게재했다. 필자는 종이신문(3월 23일자 신문)으로 이 글을 보기 전에 신문사 사장이 이 글이 yhjindo.com(예향진도신문의 전자신문)에도 게재되어 있다고 알려 주어서 읽어 보고 바로 댓글(“박주언 원장님은 아직도 ‘왜덕산 유감’ 글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학술대회나 위령제에 앞서 ‘왜덕산의 일본 수군 공동무덤’이 역사적 사실(事實)인 지를 발굴을 통해서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그런 행사를 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 날조해서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것(曲學阿世)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진도문화원장이 그러시면 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시길 바랍니다.”)을 올렸다. 그리고 박 원장에게 메일(머리말: 댓글을 올렸다는 말/본문: 댓글/맺음말: “이번 원장님의 글을 보고 주제넘게 감히 한 말씀 드립니다: 문화원장 직을 사퇴하시기를 권고드립니다.”)을 보냈다.

처음에 원장의 글을 보고, 일독(一讀)의 가치도 없는 글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원장이 여전히 ‘산 162번지의 무덤’을 ‘일본 수군 묘 100기’로 전제(前提)해 놓고, 자신이 ‘친일파’로 의심받음을 항변하거나 현 군수를 두둔하는 교언(巧言)을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댓글을 올리고 메일을 보내는 것만으로 정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원장의 글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박 원장의 필자에 대한 오해가 안 풀릴 것 같고,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사진(‘사죄문을 발표하는 하토야마 전(前) 일본 총리’)을 보고 마치 일본 총리가 지난 일본의 두 번의 침탈에 대해서 사죄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다시 한번 촉구한다. ‘친일파’ 누명과 군비 유용 혐의를 벗기 위해서라도, 또 박 원장이 말하는 ‘왜덕산’1)의 의미를 살리고 일본 유족들의 사죄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산 162번지의 무덤’의 실체를 밝히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박 원장은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필자가 제안하는 ‘고고학자나 발굴기관의 ‘산 162번지의 무덤’ 발굴을 거부하는 것인가?

 


1) ‘산 162번지’의 산이 ‘왜덕산’(倭德山)’으로 불리는 것은 이기수(내동리, 1912년 사망)가 2003년에 현 진도문화원장 박주언에게 ‘산 162번지의 무덤을 일본 수군의 무덤’이라고 말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박 원장은 ‘산 162번지의 무덤’을 고증(考證)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되레 한술 더 떠서 그것을 ‘일본 수군 묘 100기’로 날조•유포함으로써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란과 사태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왜덕산’ 유감 글 참조요).

 

박 원장은 필자의 지난 글(「‘왜덕산’ 유감」)에 대해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그에 대해서 각각 반박해 보겠다. 첫째는 “발굴 기사는 언제 쓸 것인가? 이 교수는 이걸 알아야 한다. 기자들(‘세계적으로 취재 파트에 종사하는 직업인들’:박 원장의 표현)은 24시간 비상 대기 상태이다. 만약 왜덕산 같은 경우 이 교수가 기자 신분으로 취재하여 데스크에 보고할 때 ‘현장 발굴을 거쳐 시신이나 유물 분석 후 기사를 쓰겠다’라고 하면 이 교수는 그 자리에서 사표를 쓰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필자가 기자였어도 마땅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표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반문(反問)하겠다. ‘왜덕산’에 관한 기사가 무슨 시간을 다투는 기사라고 그것도 한 사람의 전언(傳言)을 그 진위(眞僞) 여부도 가리지 않은 채 그대로 기사화(記事化)하는 기자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는 사이비 기자일 것이었다. 그 사이비 기자는 마땅히 사표를 써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2003년 당시 박주언이야말로 이기수의 전언(傳言)만을 믿어버리고 ‘산 162번지 무덤’의 실체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 산을 ‘왜덕산’(倭德山)으로 명명(命名)한 사이비 기자였던 셈이다.

둘째로, 박 원장은 필자의 지난 글의 핵심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그 글의 중심 내용을 “박주언 원장은 그 행사(학술대회와 위령제)를 준비하면서부터 문화원 안팎으로부터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 그 결과 행사 이후에 진도문화원의 주변 인사들은 박 원장을 ‘친일파’로 의심하고(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지배하고 수탈하는 대신 근대화시켜 주었다고 강변하고, 독도를 자국의 고유 영토로 여기며, 강제 징용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세계 여러 곳의 위안부 할머니 동상을 철거시키는 이 엄중한 시기에 친일파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왜덕산’의 의미를 기리고 일본 수군의 유령을 소환하여 위령제를 지내줄 수 있겠는가?), 국민의 혈세를 유용(流用)한 진도군청을 성토하고 있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는 필자의 글을 완전히 오독(誤讀)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필자는 결정적 실수를 범했다.”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필자가 ‘그 행사에 참여하여 왜덕산의 유래와 행사 내용을 취재하고 정확히 알리면서 문제점을 지적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고서 글을 쓰는 실수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전혀 실수하지 않았다. 필자는 학술대회의 토론자로, 그리고 위령제에 참여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는데도 두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산 162번지 무덤’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두 행사는 아무런 의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산 162번지 무덤’을 발굴한 결과 그것들이 일본 수군의 무덤이 아니라고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두 행사와 학술대회의 발제문은 ‘사기극’이나 ‘공염불’(空念佛)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가까운 과거에 왜덕산을 놓고 벌어졌던 일들을 박 원장은 알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 그 일들을 복기해 보겠다: 2006. 6, 진도군수는 ‘산 162’에 ‘2006년 왜덕산 관광안내문’(〔이 묘역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대첩 시 울돌목에서 전사한 일본 수군들의 시신이 떠밀려 오자 이곳 내동리 주민들이 비록 적군이지만 죽은 영혼들에게 온정(溫情)을 베풀어 준 아주 뜻깊은 역사의 현장입니다. 그 후 왜인(倭人)들에게 덕(德)을 베풀었다고 하여 왜덕산(倭德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곳은 명량대첩의 또 다른 교훈을 남겨주는 곳입니다. (2006. 진도학회 작성) ◎ 위치: 전남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임162번지 ◎ 왜덕산 공동묘지: 일본수군묘 100기 /진도군수〕) 간판을 설치했다./2007. 1, 전 진도문화원장 박문규는 왜덕산 관광상품화를 반대하는 반론을 신문에 게재했다./2008. 1, 진도군수는 주민의견 수렴, 역사적 고찰, 과학적 검토를 지시했다./2009. 1, 전남행정심판위원회에 관광안내판 철거에 대한 행정심판을 구하는 행정심판청구서를 제출했다./2011. 3, 국사편찬위원회 진도사료조사위원 박문규는 ‘日本人의 공동묘지百基라니 역사왜곡 웬말이냐? 진도군수와 진도학회는 관광상품화를 철폐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위령탑 분쇄시위를 했다./2014. 8, 청와대 신문고와 대검찰청에 군수의 친일 행위를 징계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2014. 9. 14, 탄원 건을 대검찰청으로부터 넘겨받은 해남지청은 군수에게 소환장을 발부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군수가 군민들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빌자 고발이 취하되었다./2015. 5. 29, ‘산 162번지’에 ‘와덕밭史跡址’2) 비(碑)(〔1439年 世宗實錄/와덕밭史跡址/왜닥나무심던公楮田/日本 희구마 교수는 와덕밭(瓦德田)으로 조사/檄文! 와덕밭 山所墓主 박문규 돌 세우다〕)를 세웠다.(현재 이 비는 없고, 새 안내문 간판이 세워져 있다: 〔왜덕산(倭德山)/이 묘역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명량해전 시 울돌목에서 전사한 일본 수군들의 시신이 떠밀려 오자 이곳 내동•마산•오산•지수•지막•하율•항조 주민들이 비록 적군이지만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준 곳으로 죽은 영혼들에게 온정(溫情)을 베푼 아주 뜻깊은 역사의 현장입니다. 그 후 왜인(倭人)들에게 덕(德)을 베풀었다고 해서 왜덕산(倭德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곳은 명량해전의 또 다른 교훈을 남겨주는 곳입니다. ※ 왜덕산 현황 ―위치: 전남 진도군 고군면 산162번지 ―분묘수: 약 100기 진도군수〕: 이 간판은 2022년 9월 24일 위령제 직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필자 주)

이처럼 2006년 6월부터 시작된 군청의 ‘왜덕산 관광상품화사업’은 2014년 9월에 이르러 군수의 사과로 중단되었고, 2015년 5월에 ‘산 162번지’에 〔와덕밭史跡址〕 비(碑)가 세워짐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물론 이것으로써 ‘산 162번지 무덤’의 실체가 규명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8년여가 흘렀다. 박 원장은 8년여 전의 ‘산 162번지의 무덤’의 실체 규명의 역사를 군민들이 잊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2022년 9월 23~24일에 ‘이기수(내동리, 1912년 사망)의 왜덕산(倭德山)’을 소환함으로써 다시 군민들 사이에 논란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고, ‘왜덕산 사람들’(박 원장의 표현)과 일본 수군의 유족들을 기망(欺妄)하고 있다.

 


2) 박문규는 『세종실록』•『세조실록』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근거로 하여 ‘산 162’를 ‘왜닥밭•와덕밭•와덕전(瓦德田)’으로 고증했던 것 같다.
A. 예조에 전지하기를, "대마도(對馬島)에 사람을 보내어, 책 만들 종이 왜저(倭楮)를 구해 오게 하 라." 하였다(『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29일).
B. 조지소(造紙所)에서 아뢰기를, "강화(江華)에 심은 왜닥 씨(倭楮種)를 바다 기운이 서로 연해 있는 충청도의 태안(泰安), 전라도의 진도(珍島), 경상도의 남해(南海)·하동(河東)에 나누어 심게 하옵소 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1월 13일).
C. 승정원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도내(道內)의 영광(靈光) 거 두산(巨頭山) 동쪽 산기슭에서 왜저(倭楮)가 나는데, 수령이 숨기고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매우 옳지 못하다. 왜저의 조수(條數)를 친히 살펴서 계달하고 또 간수(看守)하는 사람을 정하여 엄하게 금방(禁防)을 가하라." 하였다(『세조실록』 29권, 세조 8년 11월 12일).

위 세 기사 내용을 정리하면, 세종은 12년(1430)에 종이 만드는 기관(造紙署)를 관할하고 있는 예조(禮曹)에 대마도에 가서 닥나무 씨를 구해 오라고 명령했다(A). 이후 조지서에서는 대마도에서 구해 온 닥나무 씨(대마도의 닥나무, 즉 ‘일본의 닥나무’라고 해서 ‘倭楮’, 그 종자를 ‘倭楮種’, 닥나무 재배 밭을 ‘楮田’으로 표기함)를 강화도에서 시험 재배하도록 했고, 세종 21년(1439)에는 강화도의 기후•토질 등과 비슷한 충청도 태안(泰安), 전라도 진도(珍島), 경상도 남해(南海)·하동(河東) 등으로까지 닥나무 재배지역은 확대되었다(B). 이후 세조 연간에도 닥나무 재배지역은 서•남해 연안의 군•읍으로 계속 확대되었다. 그러나 저전(楮田)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또 그만큼 관리가 부실해지기도 했다(C). 진도의 닥나무밭(楮田)은 진도현이 해진현(海珍縣)으로부터 분리되어 진도군으로 복귀하면서 지금의 내동리 ‘산 162’의 산의 산자락인 ‘산 162번지’가 닥나무밭(楮田)으로 개발되면서 ‘왜저전’(倭楮田)이 되었고, 또 밭 한 귀퉁이에 기와를 굽는 가마가 설치되면서 ‘와덕전’(瓦德田)이 되었다. 이때부터 내동리 ‘산 162번지’의 산은 와덕산(瓦德山)(『1922년 창녕조씨정언공파세보昌寧曺氏正言公派世譜 全』에 ‘臥德山’으로 기재) 으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제 박 원장은 더 이상 곡학아세(曲學阿世)해서는 안 된다. 군청이 해야 할 일은 고고학자들과 발굴기관(유해발굴단)의 ‘산 162번지의 무덤’ 발굴을 추진하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박 원장은 ‘산 162번지의 무덤’ 2~3기만 발굴해도 그 실체가 밝혀질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왜덕산의 고고학적 발굴사업은 좀 더 범위를 넓혀 둔전만으로부터 오류만, 벽파 연동만, 원포 벌포까지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 것임을 빌미로 발굴사업 자체를 차단하려고 하는 억설(臆說)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삼척동자라도 박 원장의 속내를 간파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이기수의 ‘일이 커져 버렸다. 이제 와서 그 발언(‘왜덕산’의 의미)을 부정하게 되면 자기는 감옥 간다’라고 했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발굴은 박 원장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산 162번지의 무덤’ 발굴 결과, 그것이 일본 수군의 무덤으로 밝혀진다면 박 원장으로서는 ‘친일파’의 누명을 벗을 수 있고, 박 원장의 말마따나 한•일 간의 화해와 세계 평화를 진작시킬 수 있을 것이며, ‘진도는 세계에 생명의 땅’으로 알려질 것이다. 또 군수는 더 이상 사과나 사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고고학자들과 발굴기관(유해발굴단)의 ‘산 162번지의 무덤’ 발굴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그리고 ‘산 162번지의 무덤’의 실체가 규명되기 전까지는 군청은 지금의 ‘산 162번지’에 세워져 있는 〔왜덕산(倭德山)〕 안내 간판을 철거해야 할 것이고, 진도문화원과 군청은 앞으로 ‘왜덕산’ 관련 모든 행사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진도문화원장 박주언과 군청에 바란다. 박 원장은 ‘산 162번지의 무덤’ 발굴을 왜 거부하는지를 공개적으로 대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군청은 ‘산 162번지의 무덤’ 발굴 계획을 가까운 시일 안에 밝히기를 바란다.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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