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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를 바라보며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를 바라보며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04.2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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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도(藝都 : 민속문화예술 수도) 진도(珍島)의 예혼(藝魂) -

                                                                                                      진도군 고군면 오일시 박영관

엊그제까지만 해도 산과 들이 꽃 잔치를 벌이더니 산은 어느새 깨어 연녹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자연의 위대함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진도는 곳곳을 보노라면 어디나 유서 깊은 곳이다. 역사적으로 우리 진도가 중심이 되었던 큰일 두 가지를 든다면, 고려 시대 몽골과 끝까지 싸우기 위해 강화도에서 진도 용장성으로 이동하여 항쟁한 삼별초의 자주정신 얼을 확인할 수 있는 용장성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명량대첩(鳴梁大捷)을 들 수 있다.

 진도 용장성(龍藏城)은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고려 시대 삼별초가 새로운 거점으로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축조한 성으로 사적이다. 1964년 6월 10일 대한민국 사적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원종 때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 군이 1270년(원종 11) 6월 강화도에서 원종의 6촌인 승화후(承化侯) 온(溫, ?∼1271)을 왕으로 추대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세웠고, 그 뒤 이곳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몽골에 치열하게 대항한 유적지이다. 용장성은 진도 북쪽 해안의 산 능선에 있고, 북쪽 해안에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항이 있으며, 울돌목으로 이어지는 조운로(뱃길)의 길목이다. 용장성 외에도 삼별초와 관련된 사적지는 진도의 여러 지역이 전설처럼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 4. 28.(인종 원년 음력 3. 8.)∼1598. 12. 16.(선조 31년 음력 11. 19.)]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존경받는 위인 중 한 분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1546. 4. 28.(음력 3. 8.) 자시(子時)에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의 건천동이란 지금의 인현동(仁峴洞)인데, 아마 청계천의 물이 흐르다가 이곳에서 땅이 마른다고 하여 건천동이라 불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서 몇 걸음 더 걸어가면 동네 이름이 필동(筆洞)으로 바뀌는데 지금의 ‘한국의 집(옛 박팽년의 생가)’에서 두 번째 주유소가 바로 ‘유성룡의 생가터’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과 이순신의 인간적 관계는 유성룡이 이순신 장군보다 세 살 위이니 유년 시절부터 이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의 출생지라 부연할 필요 없이 ‘충무로’이다.

1967년 1월 6일, 공보부가 4월 28일을 ‘이충무공 탄신기념일’로 고시했고, 1973년 3월 30일에 법정기념일로 정했다. 주관 부처는 공보부의 후신인 문화체육관광부이다. 민족의 성웅인 충무공 이순신의 애국 위훈을 길이 전승하고, 민족자주정신을 선양할 목적으로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로 2013년 명칭이 변경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은 대한민국의 기념일 중 위인들의 생일에서 따온 두 기념일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 5. 15. 음력 4. 10. ∼ 1450. 4. 8. 음력 2. 8.)의 생일인 스승의 날(5월 15일)인데, 이날에 세종대왕 탄신 기념행사도 벌이긴 하지만, 원래 기념일을 만든 취지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임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순수하게 ‘한 위인을 기념하는 날’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 유일한 셈이다.

이는 충무공이 개인의 명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충무공은 나라에 무공을 세워 죽은 후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대표적 인물로는 이순신(李舜臣)을 비롯해 김시민(金時敏, 1554∼1592), 남이(南怡, 1441∼1468), 정충신(鄭忠信, 1576∼1636) 등 조선 시대에만 충무공 시호를 받은 사람이 무려 9명이나 된다고 한다.

 향토유형유산 제5호(2001년 10월 30일 지정)인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는 1956년 11월 29일에 건립되었다. 벽파마을 동남방 바위 동산 정상부에 있는 이 비는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참전 순절자를 기록하여 진도 군민의 충효정신을 돋보이게 한다. 가로 14m, 세로 18m의 넓이로 비 주변의 암석을 다듬고 석축을 쌓고, 비신(碑身)의 높이 3.8m, 폭 1.2m, 두께 0.58m의 자연암을 떨어내어 조형한 높이 1.2m, 폭 4.7m, 길이 5.7m 규모의 거대한 거북좌대[귀부(龜趺)] 위에 세웠고, 그 위로 높이 1.2m, 폭 1.2m. 길이 2.1m 크기의 이수(螭首:건축물이나 공예품 따위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 비석의 머리, 궁전의 섬돌, 돌기둥에 많이 새긴다)를 올려놓았다. 이충무공의 넋을 담은 동양 최대 높이의 비로 벽파항의 넓은 바다를 굽어보며 장엄하게 서 있다.

비신(碑身:비석의 몸체)은 화강암으로 전북 고창군 성송면 추월산에서, 이수(螭首)는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뒤쪽 구렁골에서, 귀부(龜趺)는 여느 비와는 달리 현지의 천연 자연 암반을 발파해 떨어내어 장대한 거북을 조형하였다는데 그 의미가 깊다.

비문은 당대의 대표 시인 이은상 선생이 짓고, 글씨는 우리 고장 출신 서예가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 선생이 비명 9자, 본문 749자, 말문 85자, 찬시 134자를 예서체로 글씨 형태가 전부 다르게 썼다는 점에서 그 예술적 가치 또한 인정받고 있다. 소전 손재형 선생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의 뒤를 잇는 서예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소전 선생은 서예가로 붓글씨의 호칭을 두고 중국이 서법(書法), 일본이 서도(書道)라고 부르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서예(書藝)라고 부르자고 제창했으며,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가였다. 1945년 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에게 받아온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며칠 후면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 돌아온다. 명량대첩[1597(선조 30) 9. 16.)]지인 이곳에서 장군의 탄신에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보다 유서 깊은 벽파진과 녹진 일대에서 민속문화예술(民俗文化藝術)로 의미 있는 행사를 하면 어떤가 생각해본다. 진도는 역사적으로 오롯하게 충(忠)과 의(義)의 고장으로 지금까지 재현(再現)된 곳이다. 충(忠)과 의(義)의 정신이 뿌리 깊게 내려 예혼(藝魂)으로 승화(昇華) 발전하여 민속문화예술로 꽃피고 있지 않을까?

정신문화가 맑아야 문화예술도 긍정적인 모양으로 꽃피게 되고, 문화예술의 향기도 더 멀리 퍼져 ‘진도는 역시나 예도(藝都)라 다르구나’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중심체가 되자. 순간순간을 먹물이 번지지 않고, 해맑은 정신문화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도록 발걸음을 다잡아 보자. 그 힘의 중심은 바로 ‘우리’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용장성(龍藏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ppts://encykorea.aks.ac.kr) 7권.

두산백과, 『이순신(李舜臣)』, 두산백과 두피디아.

노승석 옮김, 이순신(李舜臣), 『난중일기』,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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