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에 설치되어 있는 문화원은 사실상 ‘지역문화원’으로서 자기 고장의 문화를 조사보고하고 보존 및 전승, 선양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시군과 시도의 지방행정 기관에도 지역문화를 담당하는 부서가 별도로 있어 문화재 관리와 문화행정 업무를 수행한다. 공적 기관의 지방문화 업무를 담당할 전문 인력 수요가 적지 않지만, 대부분 비전공자 또는 비전문가들이 담당 업무를 맡는다. 지역문화를 제대로 전공하여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는 학과가 없는 까닭이자, 지역문화 행정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지방정부의 안일한 발상 탓이기도 하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1항에 따른 지역문화 전문인력 양성을 위하여 「고등교육법」 제2조에 따른 대학 및 문화진흥 관련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 또는 단체를 지역문화 전문인력 양성기관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전문인력 양성 기관인 대학에서는 지역문화학이 독립적 분과학문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것은 지역문화학의 학문적 한계 탓이 아니라 대학사회의 현실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문제로 생각된다. 교수들은 사회를 비판하고 변혁을 주장하면서, 정작 자기가 속해 있는 대학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기존 체제에 안주하고 있는 셈이다. 등잔 밑을 밝히면 장벽의 허물도 드러나고 장벽을 무너뜨릴 대책도 떠오른다. 따라서 지역문화학의 가능성은 먼 데서 찾을 필요가 없다. 지역문화는 등잔 밑처럼 우리들의 생활세계와 아주 가까운 데 있는 까닭이다.
3. 지역문화학의 가능성과 인문학문의 혁신
지역문화학의 첫째 장벽은 대학사회의 구조이다. 현실 사회는 엄청 달라졌는데, 대학은 여전히 초기의 분과학문 체계 속에 갇혀 있는 현실이 문제적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하면서 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분과학문으로 온전한 문화학과가 없다는 것이 기이한 일이다. 21세기 인문학문은 문화학이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이제 외국어를 익혀서 취업을 하려고 외국어문학을 전공하는 시대는 지났다. 문화는 엘리트 중심의 어문생활이 아니라 예사사람들의 일상생활 곧 사람들의 생활 방식(ways of life)으로 규정된다. 등사회의 민중생활을 어문학과 대등하게 주목하는 문화학을, 문사철의 핵심으로 주목해야 시대와 함께 가는 인문학문을 개척할 수 있다.
4. 지역문화의 편견 극복과 탈근대 인문학문 경향
현대사회의 지역모순을 해결하고 새로운 학문 경향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문화학에서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지방자치제로 가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 중심에서 세계화와 지방화가 함께 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사회는 서울 중심의 중앙주의가 관철되고 있어 중앙과 지방 사이의 지역모순이 심각하다. 그러므로 지역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화학에서 지역문화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서울말을 표준말로 삼는 것과 같은 무리한 중앙주의로 지역을 종속화시키는 것을 극복해야 지역문화 다양성이 살아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문화는 곧 서울문화라는 왜곡을 낳게 마련이다. 문화에는 표준문화란 것이 있을 수 없다.
중앙은 모든 지역의 권력과 금력은 물론, 지역의 인력까지 두루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 구실을 해왔다. 정치권력을 비롯하여 지역의 경제력도 서울에 몰리고 지역의 인재와 예술가, 연예인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의 예사사람들까지 노동력으로 동원되는 바람에 인구도 서울에 몰리게 되었다. 그 결과 서울은 인구가 너무 많아서 탈이고 지역에는 인구가 너무 적어서 탈이다. 중앙주의가 지역모순의 원천이다. 지역대학 교수들도 기회만 있으면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려 한다. 몸은 지역에 있어도 마음은 늘 서울에 있다. 자기로부터 가족과 마을, 고장과 지역, 국가와 민족, 세계와 인류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체계다. 앞산과 뒷산을 아는 데서부터 이웃의 높은 산과 백두산 한라산을 차례로 알아가야 하고,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에서부터 이웃의 강물과 낙동강, 섬진강을 차례로 알아가야 한다. 자기 고장을 모르면서 다른 고장을 공부하면 잘 알 수 있을까.
5. 일반 문화학으로서 지역문화학의 가능성
모든 문화는 지역문화이다. 지역문화로 발생해서 성장하고 전파되어 확산되고 공유되는 것이 문화의 존재양식이다.
진도아리랑은 세계 어디에서 불러도 진도아리랑이다. 하회탈춤은 서울에서 공연되든 영국에서 공연되든 하회탈춤이다. 이처럼 지역적 특성을 지닌 문화 현상은 해당 지역을 벗어나도 지역문화의 고유성을 인정받기 마련이다. 평양냉면이나 하회탈춤, 진도아리랑, 강릉단오굿처럼 지역명이 붙어 있지 않아서 중국에서 비롯된 음식으로 알기 십상이다.
그 동안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하면서 바깥세상을 모르는 사람을 비웃어왔다.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와 달리 바깥세상만 아는 ‘우물 밖의 개구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다. 그만큼 주체의식이 없고 남의 눈만 의식하면서 외세에 종속된 가치관 속에 살았던 것이다. 제 할아버지의 생애사는 알지 못하면서 위인전에 나오는 유명 인물의 생애사 공부에 몰두하고, 할머니의 시집살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페미니즘에 골몰하기기 일쑤이다.
우물 안과 밖은 서로 떨어져 있는 딴 세상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하나의 세상이다. 우물 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듯이 우물 밖도 세상의 전부가 아닌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누구나 우물 안에 살면서 우물 바깥과 소통하고 교류하며 살아간다. 그러자면 우물 바깥세상을 잘 알아야 하는 것처럼, 자기가 지금 발을 딛고 사는 우물 안의 세상도 잘 알아야 한다. 지역을 잘 알아야 세계도 잘 알 수 있다. 안팎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지역문화가 세계문화인 까닭은 두 가지이다. 어떤 지역에도 없는 문화는 결코 세계문화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문화는 지역문화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아리랑이란 정선아라리,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경기아리랑 등으로 존재한다. 여러 지역 아리랑에서 벗어난 한국 아리랑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 아리랑을 연구하려면 결국 구체적으로 특정 지역의 아리랑을 조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 아리랑은 곧 특정 지역 아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역아리랑이 한국아리랑이고 한국아리랑이 지역아리랑이다.
지역문화 없는 민족문화는 존재할 수 없으며 민족문화 없는 세계문화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세계문화도 지역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실체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라도 특정 지역에 주소를 두고 사는 한 개인이자, 해당 거주지의 지역주민일 따름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자 세방화 시대로 가고 있다.
6. 지역문화의 역설적 인식과 연구방법의 가능성
지역문화가 세계문화이고 세계문화가 지역문화인 것처럼, 지역문화 전문지식이 세계문화 전문지식이다. 지역문화가 세계문화를 구성하는 구체적 실체인 것처럼, 지역지식이 세계지식을 구성하는 가장 실체적인 지식이다. 그러므로 저마다 지역문화 전문가가 되어야, 한국문화 또는 세계문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모든 사진은 면이 아니라 화소라는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소가 촘촘하고 많을수록 사진의 질도 높아진다.
경기 아리랑이나 정선아라리로 한국 아리랑을 논하는 선묘법이나 면묘법의 시대는 지났다. 한국아리랑 연구는 각 지역 아리랑을 순수하게 하나의 아리랑으로 연구하고 그 연구한 성과가 아리랑 연구의 화폭에 수많은 점으로 채워졌을 때, 비로소 한국 아리랑의 실체가 전모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 동안 다루어지지 않았던 지역의 아리랑을 조사연구하여 한국아리랑의 새 지평을 넓혀나가야 한다면, 지역아리랑 연구의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려 있다. 백두산은 몰라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앞산과 뒷산을 모르면 일상생활에 상당한 불편을 겪는다. 따라서 지역주민들 누구나 앞산과 뒷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생활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 알고 있는 까닭에 앞산과 뒷산에 대한 특별한 연구는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진다.
지역문화학은 우물 안을 잘 아는 개구리가 되는 것이자,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부분적 인식이지만, 바깥과 전체를 말하지 않고 지역문화 자체를 안으로 탐구하는 까닭에 더 정확하게 더 구체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작은 점묘법으로 대상의 실체를 인상주의적으로 포착한 것처럼, 지역문화를 지역문화로서 면밀하게 조사하연구하는 학문이 지속적으로 축적될 때 비로소 민족문화와 인류문화가 제대로 포착될 수 있다.(임재해. 인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