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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과 거름 칼 럼
똥과 거름 칼 럼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11.1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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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똥이다”

어린 시절 나는 똥을 제 몸처럼 굴리거나 아예 똥 속에서 세상을 사는 인간 아닌 ‘아름다운’ 곤충들을 가끔 보았다. 먹는 것에 너무 지랄 떠는 것이 인간이다. 싸는 것도 신장 구조를 통해 우아하게 배설하려 여러 장치를 만들었다. 도시의 목욕장은 매우 충족적이다. 하지만 배설 방식과 연결된 도시의 구조는 그 도시를 가장 위협시키는 원인을 제공한다. 재생산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불거리고 긴 관들은 ‘정화’라는 화학첨가물을 헐떡거리며 받아들인 뒤 방울뱀보다 더 낮은 몸체로 전혀 역겨움을 갖지 않고 날마다 시시 때마다 구역질을 한다. 뉴욕의 하수구에는 악어가 산다고 했다. 우리의 도시는 악어들로 드글거린다. 블렉홀같은 씽크홀이 시멘트 아래 입을 가득 벌리고 있다. 도시는 정글이다. 피비린내 나는 밥상이다.

밥은 사실 지독하게 계급적이다. 황후의 만찬과 거지의 식사가 같을 수 없다. 반면 똥은 평등을 지향한다. 똥 누는데 왕후장상과 백성의 차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되레 똥은 수신(修身)과 관련돼 있다. 얼마나 자신을 잘 관리하는가의 여부가 똥으로 확인되지 않는가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똥을 매화꽃으로 비유하였다. 기똥차게 살지 못하면 병이 들어온다. 전경수 인류학자는 똥 예찬론자다. 서울대 제자들을 데리고 진도 소포리에 오면 똥 푸는 일부터 가르친다.

똥을 제대로 대접 못한 건 인간 문명의 탓이 크다. 똥에도 오행이 있다. 똥과 물이 섞이면 상극이지만, 똥이 흙과 섞이면 상생이 된다. 똥에는 유기물이 많아서 물에서 분해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유기물이 물의 산소를 파괴해 수질을 오염시키는 '나쁜 똥'이 된다. 똥을 분해할 수 있는 건 흙 속의 미생물이다. 예전 제주도나 진도에서는 사람이 눈 똥을 돼지가 먹고 살았다. 자칫 불알을 물리면 여지없이 ‘돼지고자’가 된다. 돼지의 똥은 논과 밭에서 자라는 비료로 사용하는, 순환되는 재활용의 고리에선 쓰레기가 없다. 이런 생태계의 흐름에서 밥은 똥이고, 똥이 밥인 게다. 입술과 똥구멍의 피부질감이 비슷한 것도, 밥과 똥이 한통속이란 생물학적 표현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라고 진 교수는 묻는다. 하지만 머리 속에서 똥은 더럽다는 인식이 밥과 똥 사이를 이산가족처럼 갈라놓는다. 여기다 서양 문명이란 이름 아래 똥과 물이 섞이면서 생태적 참극이 발생하는 거다. 냄새 난다고 수세식 변기의 레버를 내리면 그만이지만, 똥이 물과 함께 섞이는 순간 상당한 물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거다. 정화가 풍화를 동반하지 않는 속도에 취해버리면 거대한 오물바다 ‘똥바다’가 된다.

다시 말똥구리에게 인간이 배워야 할 차례이다. 요즘 참 똥 같지 않은 인간들이 득실거린다. 향기로와야 할 인간관계가 똥냄새를 풍기며 탐진치를 바른다. 허유가 귀를 씻어낼 맑은 시냇물이 보이지 않는다. 정치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치고 구린내나지 않는 이들이 없다. 각설이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무대를 떠나버린다. 광화문을 가득 메운 아프리카산 똥돼지들이 악을 쓰면서 기득권을 고수한다. 조용필이 외치던 ‘촛불을 지켜다오’도 우이독경이다. 경찰청은 우두(牛頭)산이다.

진도에도 우리 곁에도 그런 소대가리가 없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노인을 위한다는 사무실에서, 여관방에서 인두껍을 쓰고 사탕과 위협을 번갈아 내보이며 중립의 초례청 젖가슴을 탐하는 늑대들을 더욱 경계해야 할 계절이다. 붉은 단풍잎을 벗어나 멧돼지가 저자거리로 나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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