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8:57 (금)
진도의 향토유산
진도의 향토유산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12.28 16: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1호] 오산선돌

오산선돌은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이다.

고군면소재지에서 지방도 801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오상리에 이르게 된다. 입석은 마을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일명 ‘선바위’라 불리고 있으며, 주변에 오상리 지석묘가 있다.

1968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남해 도서지역 고고학 조사시 발견되어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그 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1987년 재조사하였다.

오산 선돌은 넓은 면이 서남을 향하고 있으며, 인공의 흔적이 없는 자연석이다. 크기는 높이는 3.6m, 너비 1.2m이다. 마산방조제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오산 선돌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마을에서 이 선돌에 대해 특별한 행사를 하지는 않지만, 주민들은 막연히 ‘선바위’가 오산리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향토유형유산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산 선돌은 지석묘와 함께 있는 묘 표석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마을을 보호한다는 벽사적 기능을 지니고 있어 입석의 민간신앙적 의미를 밝힐 수 있는 자료이다.

[제2호] 옥대고인돌군

옥대고인돌군은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이다.

돈지리에서 옥대리로 가다 보면 옥대리 마을 좌측 구릉상에 21기의 지석묘가 타원형을 이루며 모여 있다. 주변에 많은 석재가 널려 있어 지석묘의 아래쪽이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고인돌군은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조사되었다.

지석묘의 아래쪽이 매몰되고 파괴되어 확실한 형식을 알 수 없다. 규모는 일정치 않으며 중·소형 지석묘들이 뒤섞여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길이 330㎝, 폭 220㎝, 두께 70㎝이며, 전체적으로는 길이 110~330㎝, 폭 70~280㎝, 두께 30~140㎝의 크기이다.

지석묘 주변에서 마제석촉 1점이 수습되었다.

주변에 많은 석재가 널려 있으며, 주변에서 수습된 마제석검은 진도군 향토관에 소장되어 있다. 향토유형유산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3호] 지력산 동백사지

지력산은 진도군 지산면 와우리에 있고 이 산에 동백사지가 있다. 동백사지에 대한 창건 및 폐사와 관련한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전해오는 것에 따르면, 고려 초에 창건되었던 지산면 내에서는 가장 큰 절이었으나 한 스님이 산의 지맥을 절단하여 폐사되었다고 한다. 당시 천마가 있는 힘을 다해 비상하려고 박차고 뛰어오르던 바위가 지금의 말발굽바위라 전한다. 그 바위에는 한 개의 깊은 말발굽이 남아 있다. 이는 말발굽바위의 지형이 천마기풍(天馬祈風)이라는 명당인데 천마의 목에 해당하는 곳을 자르게 되어 나타난 일이라고 한다.(말굽바위전설 참조)


                                                                                    배중손 동상 임회면 굴포리

[제4호] 삼별초 궁녀둠벙

삼별초가 추대했던 왕족 출신 承化侯 王溫은 지금의 의신면 침계리에 있는 ‘왕무덤재’에서 붙잡혀 ‘논수골’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전투 중에 피난 중이던 여기급창 등 궁녀들은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길재’를 넘다 몽고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언덕을 따라 내려가 지금의 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부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과도 매우 흡사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 뒤 비가 오는 날이면 이곳 둠벙에서 여인네의 울음소리가 슬피 들려오고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전 까지만 해도 밤에는 이곳을 지나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이곳 둠벙을 가리켜, 이후 진도사람들은 ‘여기급창둠벙’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이곳 둠벙의 수심은 매우 깊어서 절굿대를 넣으면 우수영 또는 금갑 앞바다로 나온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제5호]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1956년 11월 29일 건립) 이 전첩비는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면서 진도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하였다. 전첩비의 구조를 살펴보면 비신 높이 3.8m, 폭 1.2m, 두께 58cm이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

이 비는 벽파리 앞동산 산마루에서 동쪽을 향해 서있다. 당초 바위산을 이용하여 천연 거북좌대를 조상(彫像)함으로써 전첩비의 위용과 예술성을 격상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비수(碑首)는 고군면 내산리 구렁골에서 청석원석을 채석하여 작업하였고, 비신은 전북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추월산에서 채석하여 벽파로 옮겨 채석탁마공사를 하였다.

이 비문은 전체 888자가 새겨져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중략)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公)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를 지키셨나니 (중략) 15일에 진(津)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깊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