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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역사인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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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5.0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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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진도가 낳은 인재 당촌 곽우춘 선생

임명장 등 유품 서울에서 무더기로 나와!

“6.25 때 좌익 폭도들에게 가족 8명 중 7명이 학살”

 

 

박병훈 전 진도문화원장(현 진도아리랑 보존회장)

지금부터 100년 전 일제강점시대, 저명한 인사였던 곽우춘(곽우춘. 호 당촌. 1898~1950)선생의 유품인 임명장, 합격증서 등 모두 17점이 서울 고물상에서 무더기로 발견, 향토사학계의 큰 관심이 되고 있다.

곽우춘은 현풍 곽씨로 고군면 신리 출신이며 1922년 보통문관시험 합격, 변호사 예비고사 합격, 고군면장(1932~37), 군내면장(1939~1943)해방 직후에는 진도치안심판소 초대심판관, 대한독립촉성회 진도군 고문(1946),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하는 등 공사에 신망이 두터웠던 인물로 고군면 면사무소 앞에는 면민들이 세운 그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제1화 당촌과 임순재와 얽힌 이야기

곽우춘 선생은 6.25 동란이 일어나자 인민군에게 가장 먼저 목포형무소로 끌려 갔다가 그들이 후퇴하면서 목포 야산에서 1950년 8월 16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총살을 당하였는데 다행히 시신은 수습이 되었었다고 한다.(곽재설 증언)

당촌(唐村)은 구례군청에서 근무하던 젊은 시절 “사람은 배워야 한다.”면서 진도보통학교4학년에 다니고 있던 임순재(후에 진도박물관장) 학생 등 2명에게 격려와 물질적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학생은 (중학강의록)을 보아야 한다.”면서 1년 6개월간 매달 1원 20전씩을 보내주었으며 이것이 끝나자 또 보통문관 시험에 응시하라면서 「시험강의록」 대금으로 또 매달 1원 20전씩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순재씨와 함께 공부했던 운강 조병문(전 진도군수. 국회의원)씨는 한참사(한명이)씨가 서울 여비를 대주어 상경, 보통고시에 합격을 하였는데 임순재는 서울 가는 여비가 없어서 시험을 그만 포기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를 안 당촌은 임순재를 크게 나무라며 다시 시험 보기를 권했으나 임순재는 그만 일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고 한다.

제2화 6.25와 가족 몰살

당촌의 가족(부인과 아들 5명.딸1명)은 적도들의 최후 발악으로 1950년 9월 말 어느날 밤 폭도들에게 포승줄로 한데 묶이어 끌려가던 중 어둠 속에서 부인 박옥과(朴玉果)가 순간의 기지로 장남인 병진(당시 19세)의 뒤로 묶인 철사줄을 이빨로 물어뜯어 풀어주어 도주케 하여 장남을 살려내 가문의 절손은 면하였으나 부인과 아들 넷, 딸까지 모두 6명이 인민 폭도들에게 무참히 학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제3화 장남 곽병진(郭秉珍)

장남 병진(1931~2013)은 다행히 살아남아 목포 고등학교와 195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미주 워싱톤대학교를 수료하고 재무부 경제기획원 투자예산과장, 조달청내자국장, 주일한국경제사절단 총무국장, 1968년에는 말레이시아 EROPA(아태평양 행정기구)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아호는 송란(松蘭)이고 후손으로는 성훈, 명훈, 상훈이 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남긴 생전의 유언은 “공직을 맞지말라” 라면서 “내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이유는 면장 재직때 신작로 개설에 따른 토지수용의 후유증(참고:오일시~회동선 신작로 개설)이 너무나도 컸었던 같다.”라는 말이 폭도들에게 끌려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남긴 유언이었다고 한다.

제4화 발굴된 당촌의 유품

1.군내면장 임명장 2. 고군면장 퇴직급여 증서

3.보통고시 합격증 등 모두 17점이다.(사진참조)

<알림: 당촌의 후손 연락처를 아시는 분은 010 8626 4036(박병훈 진도향토사학가)으로 연락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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