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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끝은 자주 승리의 시작점
남도의 끝은 자주 승리의 시작점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10.2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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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호국의 함성 따라 찾는 '진도'

갯벌의 가치, 호국의 함성따라 2박3일 진도 섬 힐링여행

 

   
  이순신 장군 발자취, 삼별초의 흔적 따라 '진도' 여행을 즐겨보자.

 울두목, “역사의 진도는 울지 않았다!”
 ‘명량’은 역사의 회오리가 멤도는 바다다. 일명 울둘목으로 진도와 해남 사이의 295m의 물목을 말한다. 거대한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씩 넘나드는 곳이라 좁은 해역으로 물이 흐르면서 솟구치고 울어댄다. 음력 보름 전후 사리 때에 가장 심한데, 시속 12노트(약 20km 내외)의 속력으로 흘러가기에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유속을 자랑하는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1597년 9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뒤 12척의 병선을 가지고 왜적을 물리칠 장소로 진도를 선택한다. 보름동안 머물던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기자 그 다음날 마치 영화처럼 500척 정도의 왜선이 해남 어란진에 머물러 있다가 서해로 북상하기 위해 마로 해역을 거쳐 울둘목으로 쳐들어왔다.
 울둘목 물살은 오늘도 흐른다. 충무공은 명량해협에서 적과 싸우기 위해 12척의 병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저들이 해남과 진도의 좁은 목인 울둘목에 도착하면서 싸움이 시작된다. 드디어 이순신장군과 병사들이 고대하던 시간이 다가왔다. 물때가 바뀌었다. 세차게 물때를 따라서 올라오던 왜선들이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자 갑자기 물의 흐름이 역류하면서 다시 어란진 방향으로 세차게 흘러내려 가기 시작했다.

 

 왜선들이 왔던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배 밑바닥을 역삼각 모양으로 배를 돌리는데 회전 반경이 너무 길어서 급하게 도망가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충무공의 주력병선 판옥선들은 총통, 포와 화살을 쏘고 긴 창과 돌멩이를 던지며 왜선들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이렇게 12척의 함대를 가지고 왜적의 대부대를 유인하여 131척을 격파한 것은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전투였다. 명량해협 전투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정유재란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승기를 잡았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해양영웅이 된 것이다. 최근에는 장군을 도왔던, 진도군의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던 수군들이 서서히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부녀자들이 의병(疑兵)전술로 불렀다는 강강술래터가 전해오는 망금산 녹진관광지의 진도타워에 오르면 그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7층 전망대에서 다도해의 아름다운 경관과 진도대교의 위용, 울둘목의 물 흐름을 관찰할 수 있다. 거센 조수가 만들어낸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연신 물거품이 용솟음친다. 이곳에 내년까지 케이블카가 만들어지기에 진도를 방문하는 여행객이라면 우선 들러야 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 <명량>의 명량해협, 울돌목이 있는 진도바다. 영화의 부제는 ‘회오리바다’였다. 울돌목은 회오리치는 바다다. 실제로 얽히고설키는 물살의 흐름이 신비롭다. 주변으로는 진도타워와 이충무공전첩비(벽파), 그리고 진도대교를 사이에 둔 해남의 전라우수영 국민관광지 등 ‘명량’의 유적이 여럿이다.

 

 삼별초 항전지
 진도는 서남해의 요충지요 배가 닿기 좋은 곳이라 왜구들이 수시로 노략질을 해왔다. 1270년 초가을, 삼별초가 이곳으로 옮긴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몽고군에 끝까지 항전했던 삼별초군이 마지막으로 저항을 했으나, 2만여 명의 사상자와 포로를 남기며 정부와 몽고 연합군에게 패망하게 된다. 때문에 이곳에는 고려시대 삼별초와 관련된 유적이 유난히 많다. 1984년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 뭍과의 연결 통로였던 벽파진에서 길은 시작된다. 길목의 용장산성, 지금은 잡풀만 무성한 녹색의 정원인 이곳은 7백여 년 전, 독립 고려의 꿈을 노래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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