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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인의 진도문화 순례 / 2020 미술관에서 길을 묻다
박남인의 진도문화 순례 / 2020 미술관에서 길을 묻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12.1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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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관내 사립미술관 기획전 열려

 

사람은 숲에 산다. 그 많은 잎사귀에 물드는 빛깔들은 해가 내려준다. 생성과 생육은 나무와 그 아래 벗들이다. 이를 보고 분류하고 더 나누어 이름까지 지음하며 그림자 이상의 간섭을 하는 어떤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도 숲을 이루고 산다. 모두가 치열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언제든지 예술과 특히 미술이라는 장르가 보통이 넘는 싸움으로 어떻게 시대와 끊임없이 소통의 창을 열고 있는지 이제는 내 안에 닫힌 또 하나의 두꺼운 창을 깨는 눈물같은 시선이 필요하다.

진도(珍島)의 미술관들은 산야와 역사 굴곡을 통한 내부공간의 다양한 재분할과 조명이 갖가지 작품 위치와 배치를 결정하는 오늘 주거시대와 겹친다. 통로와 일관은 사람과 예술을 지극히 단순화시킨다. 작품이 생동하기 위해서는 작가나 그것을 선택한 미술관장들의 탁월한 안목과 그 눈에 흐르는, 때로 흐느끼는 강물의 꺾임과 굽이을 지극히 살피는 삶이 함께 있을 때 그 작품들은 싹을 틔거나 달빛으로 젖거나 한 시대마저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가 간절한 것은 무엇인가. 더 슬펐지만 더 아름답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 많고 작품이 더 풍성한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사람 그 한 사람의 진정성과 그 무게가 항성보다 더 밝고 무거우면서 나를 이끄는 중력을 기대한다.

요즘 내가 보는 전통수묵화는 여러 매체에서 국가 중요 연찬장 뒤로 붙박이로 다가온다. 거기까지는 중요하고 쓸모가 있다. 시는 아예 비치지도 않는다. 장식은 매우 한정되지만 그 영향은 크다. 그림과 시는 속울림이 깊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그 중심에서 자꾸 밀려나는 또 다른 ‘풍경’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지금도 부채를 좋아한다. 선풍기보다 에어컨보다 내 손에 맞는 세상 그림이나 꽃을 흔드는 그 제멋대로 멋을 누가 알겠는가. 부채는 펼쳐서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남도의 화가들이 이를 특히 행사장에서 개인 소장품이나 되는 듯 가름하는 것도 큰 모순이다. 전남도 등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지만 그 행사가 체험이 아닌 보여주기식으로 흐르면 이 분들을 대용 장인인지 행사용인지 자기역할에 물어야 할 지도 모른다.

세태의 변화는 전통 병풍이 사랑방에서 밀려나 제사상 뒤쪽으로 겨우 방풍림으로 자리잡은 것은 오래다. 한국 남종화 수묵화도 애완견 반려동물처럼 자꾸 작아진다. 배첩장들도 갈 곳이 없어진다. 그래도 그림은 살아있다. 어디에선가 루이스 글릭의 ‘야생붓꽃’처럼.

미술관과 도서관은 이제 벽이 되는 문이 없어야 한다. 하여 우리는 이 우울한 ‘거리두기’ 시대에서 미술관에서 다시 길을 묻는다.

‘그리다’ 또는 ‘쓰고 읽다’라는 곳엔 자성(自性)을 그리고 무엇보다 지성을, 자연을 통관하는 의례와 본질적인 문제로 다시 귀결되는 그 깊은 자성의 윤회가 시간과 공감을 얻는다고 본다. 시와 그림이 대중에게 헌신하거나 자기안족으로 갈 때 강은 흐르지 않는다.

 

우리시대의 미술작품들은 다양하면서 깊고 때로 간결하여 색에 취하지 않은 화면들이 저마다의 숨결을 내보일 때 사랆과 만난다. 함께 한다는 것은 기쁘고 힘들다. 시대를 같이 살면서도 이제 ‘거리’는 깊이를 지배하며 감동마저 제어시키는 오늘에 ‘길을 묻는 미술관’으로의 산책은 또 다른 독서다. 진도에 있는 미술관의 그림은 하나 하나 행성이다. 붓꽃처럼, 꽃게들의 서식지를 만드는 모래개울을 담는 바다강의 스펙트럼이 울렁거린다. 이게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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