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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간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2.2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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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긴급조치시대와 80년대 신군부독재정권시대 대한민국은 ‘간첩시대’였다. 진도는 간첩양성소나 다름없었다. 석달윤 가족, 박동운 가족 등등. 40년이 지났지만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장의균 양관수도 마찬가지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정의는 강물처럼 흘러가지 않고 대공분실이나 삼청교육대 철조망 안에서 신음을 했다.

전 대공분실 수사관은 "30년 넘은 일인데 그걸 뭘...대공분실 직원들이 전부 고문하지 않는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이근안 씨만 그렇다고는 얘기할 수 없고..."라며 "우리만 한게 아니다. 국민들은 전부 이근안 씨가 했던 걸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불법연행과 고문은 대공분실에서만 있었던게 아니라며 억울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 시절 먼 훗날 조작으로 밝혀진 간첩조작 사건은 남영동 대공분실만이 아니었다. 1981년 봄 진도에서 김양식을 하던 허현 씨는 남산 국가안전기획부로 끌려갔다. 진도간첩조작사건 피해자인 허현 씨는 60일간 겪었던 잔혹한 고문들에 대해 증언했다. 고문의 흔적은 여전히 몸에 새겨져 있다. 25년이 흐른 뒤에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고 여전히 자신을 고문한 수사관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가해자들은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까. 수소문 끝에 진도 일가족 간첩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관 유모씨는 "사건이 명백한거다. 당시 수사 관행이 구속기간을 지키지 못하고 수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불법연행과 감금이 문제가 돼 무죄가 됐을 뿐 그들은 여전히 간첩이라고 주장했다.

또다른 안기부 수사관은 "할 얘기 없다. 문제가 됐으면 그때 재판부 당사자들은 뭐냐. 재판부, 변호인, 검사는 뭐했냐. 그때 중형을 선고했는데 이의가 없다가..지금 와서 고문 받았다고 하면 근거도 없이 때렸다하면 믿어야 하냐. 당시 그 시점에 문제 삼아서 이야기 해야 하는거 아니냐. 입뒀다 뭐하냐"고 말했다.

한홍구 교수는 "진실화해위원회나 국정원, 국방부 등의 과거사위원회가 만들어지며 조사를 했고 많이 밝혀냈다. 문제는 가해자가 다 000이다. 기록이 안 돼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하고 뻔뻔한 이유가 가해자가 기록이 안 돼 있어서 그렇다"고 지적했다.

한때 서울시경 정보과에서 근무하며 대공업무에 종사했던 석달윤씨도 간첩 조작사건으로 18년을 복역했다. 석달윤 씨는 "47일간 고문 받고 만 18년 동안 형을 살았다"고 말했다. 치매초기인 그지만 지독한 병도 억울한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석달윤 씨는 안기부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아들은 "남자 성기에 볼펜 심지를 끼우는 고문이라든가 양족 종아리 무릎 뒤에 각목을 끼워서 매달아 통닭구이를 했다. 장의균씨는 재일유학생간첩사건으로 남영동 대공실에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바고 8년을 갇혀 살다 진도 죽림바닷가 시향골로 거처를 만들어 은둔생활을 하며 서당을 열기도 했다. 지금은 다시 출판사를 복원하여 최근 금강경을 재해석하여 발간하기도 했다.

허현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 안강민 변호사는 “기억이 없다.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한참 뒤에 들었다. 나는 고문 흔적을 못 봤다”고 말했다. 그는 대공중앙 수사부장을 역임하고 2008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진도가족간첩단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 임휘윤 전 검사는 “내가 그만둔 지 18년이다. 기억도 안 나고 인터뷰도 절대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정상적으로 처리했다. 쓸데 없는 얘기 말고 들어가라”며 자리를 떠났다. 그는 고검장을 역임한 뒤 건설이사 사외이사를 맡는 등 승승장구 했다.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의 1심을 맡았던 김헌무 변호사는 “서울 형사지방법원 부임해 며칠 안 돼 그 판결을 선고했다. 변명 같지만 구속기간에 쫓겨 선고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기록을 잘못 봤다고 사과해야겠죠”라면서도 “하지만 원인제공을 한 사람은 본인이다. 자백을 했기 때문에 그런 판결을 받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아직도 피해자는 존재하고 가해자는 없는 침묵과 야만의 시대는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을 찾아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라고 미얀마나 쿠데타국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8년 독재를 하던 자의 딸이 대통령을 하던 나라였다. 지금도 호시탐탐 그 때를 그리워하며 되돌리고자 하는 세력이 엄연히 이 땅에 화려한 독버섯처럼 번식하고 있는 현실이다. 진도사람들은 지금도 옛 기억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나라를 지키는데 목숨을 바쳐왔지만 되돌아온 것은 ‘간첩의 섬’으로 낙인되었을 뿐이다.

간첩을 조작하지 않으면 불안해했던 독재정권의 잔영이 세월호 참사를 불러일으키고 섬홀대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고속도로가 연결되지 않는 유일한 땅. 차별화를 아껴놓은 땅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진도는 이제 고령화와 인구 3만의 신공도화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분노하지 않으면 당연시하는 것이 독점자본주의사회정책의 속성이다. 백기완 선생이 외치던 사랑도 명에도 이름도 없이 싸우지 않으면 최루탄보다 더 지독한 뿌우연 미래가 우리를 덮쳐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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