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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립자운토방 과 여귀산
탑립자운토방 과 여귀산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3.2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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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립 자운토방)

여귀산

그곳엔 분명 신이 산다
새벽 안개가 도장기미에 닿을 때면
나무들은 푸른 머릿결을 감으러
죽림 바닷가로 걸어 내려간다
봉수대 위에 등신불로 길게 누워
소신공양을 하던 나무들
남도석성 선소 바닷가에 모여들던 삼별초
물에 부은 병사들 산딸나무 열매로
검붉게 젖은 발들 태웠던 배가 되었다더라
남동 후박나무숲에 살던 김대례
큰당골은 씻김을 할 때마다
소문의 파도살에 소박맞은 여인이
호랑이굴을 타고 올라 마고신녀가 되었다며
나무나무 나무야 노래 불렀다
산에 기대여 사는 것
여귀산 등성이 동백꽃으로
살아간다는 것
할롱 물살따라 까만 바다옷이 뜬다
하루하루가 개펄에 숨바꼭질하는
대바구 신세가 낮술을 뿌린다
장구포 멀리 바라보면
여귀산은 질베 위에 드러누운 나신이다
갯샘 들기름 한 병 머리에 이고
벌바우골 오르는 신녀들의 산
접도 구자도 대섬 갈매기섬
산타령이 둥둥 떠 다닌다.

 세상과 싸우기 위해 온 여신
*여귀산 아래 탑립마을에 찔레향이 뜨겁던 차의 선녀가 살았다. 저녁이 오면 가슴에 돋는 별들을 헤아리며 탑돌이를 하고 탑립 바닷가 자운토방으로 돌아갔다.
 큰 소나무들이 호위신장처럼 도열한 숲길 가에는 찔레꽃나무가 많았다. 묘비도 없는 봉분들이 다 마신 찻잔처럼 엎어져있던 길. 삼별초의 섬을 사랑했던 그녀. 밤이 되면 산찔레꽃 향은 어떤 장미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여신은 화려한 모란과 ‘미친년 치마폭’같다는 개나리꽃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덕신산 아래 석무골 허소치와 갈옷 입은 초의를 자주 불러 죽비소리 담긴 용장산성 성황당 산마루 차를 나누고 어란에서 벽파 피섬 녹진 우수영까지 명량수로 휘몰이 물결 속에 침몰하던 왜적들의 안택선을 휘저으며 여귀산을 치마폭에 싸고 살던 질경이 뿌리같은 인연을 새벽 원고지에 수놓던 보덕낭자.
 그녀는 보덕 관음의 현현. 자식을 셋이나 낳고도 소박맞고 마고성에서 쫓겨나 지유(地乳)의 강을 건너 그녀가 ‘꿈이로다 화연일세’를 탈고하고 백성의 소리 ‘민’(民)을 집필하던 자운토방. 대나무와 진돗개를 키우며 세상의 아픔 치유할 깊은 장을 담던 여귀산의 탑신.
 그 여신의 이름은 곽의진이다. 진도 남쪽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하는 사람들을, 개펄로 흰종아리를 문지르며 살아가는 갯가 아낙네들의 ‘실팍한 궁둥이’를 사랑하던 여인. 그곳에 가면 누구나 구름이 되었다. 서방정토로 떠나고 싶어 가슴부터 붉게 물들어 흐르던 구름. 그녀는 가사도 동백강 건너 셋방서방정토에서 살았다.
 하기사 모든 여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만의 신전을 짓기 시작한다. 시인 문정희는 여성의 몸 자체가 아름답고 신비로움으로 가득찬 신전이라며 그 비의성에 경외감을 내비쳤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기둥으로 받쳐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여귀산 그 고단한 여신으로 기꺼이 찾아온 곽의진 작가. 새벽 사경(寫經)을 할 때 등 뒤에까지 밀려온 바다가 애무를 하며 어깨를 주물러준다고 했던가. 물고기들은 목어처럼 허공을 떠다니고 전복이 자운토방 주춧돌에 달라붙은 탑립 신전. 탑립에는 전설이 오래 동안 쌓였다.  여귀산 아래 탑립마을은 층층 천수답이 탑을 이룬다. 이웃 죽림 남신과 해마다 내기를 하였는데 지혜가 넘치는 탑립여신이 매번 이기자 어느 해 죽림 남신이 탑립여신이 쌓은 탑을 새벽에 허물어버렸다 한다.

 사람은 신이다 별이다
 모든 여신은 바다를 건너 온다. 우리 민족의 근원 중의 하나인 송화강 아리수,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도 마찬가지다. 해모수가 사랑을 나눈 그 강. 나는 그 강을 바라본다. 나 또한 머리칼이 더 희어지고 술에 취하면 그 강을 건널 것이다.
 세월이 흘러 여옥이라는 가인(歌人)은 어느 강가에서 백수광부의 울음소리를 채록하여 공후인 가락에 실어 시를 지어 노래불렀다. ‘님아 저 강을 건너가지 마오’
 진도의 바다는 강이었다. 수로(水路)라고 부른다. 정유년 벽파에서 울두목까지 133척의 왜선을 침몰시킨 명량수로는 만호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사슴나루 녹진과 해남 화원반도 사이를 지나면 목포로 가는 시아바다와 만난다. 팽목과 어류포 사이 장죽수로. 그리고 맹골수로.
 오늘의 여신들은 계승자를 지정하지 않으려 한다. 오염된 지구. 섬뜩한 메시지가 미래로부터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탁을 간절하게 갈망하지 않는다. 인류를 위해 지구를 위해 예언은 빗나가야 한다. 꽃은 여전히 피어나야 하고 안전한 바닷길은 열려야 더 새로운 만남을 기대할 수 있다. 진도가 보배로운 것은 청정한 의식을 갖춘 여신들이 산과 섬마다 나무와 꽃을 키우기 때문이다. 미래의 식량자원의 하나인 해의(海衣. 물김)가 적조가 없는 연안에서 가장 많이 자라고 있다. 이 환경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녀는 살아서도 이승을 떠나서도 여전히 여귀산의 여신이다. 골짜기마다 동백꽃같은 열정이 해마다 피어나고 오봉산 아래 토방을 잊지못하는 이들이 지금도 순례를 온다. 그의 삶은 뜨거운 경전이었다. 갯샘물처럼 시대의 목마른 자들에게 기꺼이 목을 축이고 실행하지 않는 것을 질타하고 제 몸을 개옹이 되어 생명의 물길을 여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세월호 아이들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 팽목항으로 달려가던 가장 실천적이고 가장 자비로운 여신이었다. 태안 기름유출사건이 터졌을 때도 섬으로 건너가 바닷가 돌에 달라붙은 까만 기름덩어리를 닦는데 몰두하였다.
 곽의진 여신을 따라 용장 성황산 등성이를 헤매이고 강진 만덕산 야생차밭을 걸으며 백련결사의 뜻을 되새기도 했다. 3월의 여귀산 자락에는 진달래가 피어난다. 강계 자연갤러리를 다니는 춘심이는 오늘도 물이 빠진 뻘밭에서 바지락을 캘 것이다. 나의 시들은 방풍림 그늘 속에서 쉬이 지워지고 여귀산은 여신들의 자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유려한 소전체가 흐르고 허소치의 수묵산수가 언뜻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 앞을 보면 의재선생의 강산무진도가 가득 펼쳐진다. 이 모두가 화연(畵緣)이다. 세한(歲寒)을 건너온 이 봄은 반갑고 서글프다.
 진도의 여성들은 때가 되면 신이 된다. 무녀들은 그 여신과의 매개자들이다. 씻김사설은 아득한 시원의 생명성을 담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신들의 말씀이다.
 여귀산은 오늘도 솟아오른다. 남도석성을 떠난 배중손과 삼별초 전사들이 연꽃 기와 수막새를 들고 오키나와 유구열도를 건너오는 모습을 천년이 되도록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여귀산 자락에 깃들어 사는 예인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막걸리간첩 장의균. 나절로 이상은. 우초 박병락 화가. 일휴 김양수 화가. 부처들이 몰려든다.
 여귀산은 너(汝)의 귀산이다. 너와 내가 함께 존귀해지는 세상을 바닷물로 끌어 올리는 산이다. 신은 사람이다. 죽어서 더 푸르러지는 상록의 산이다.
 이 산 아래 죽림초등학교는 폐교되었지만 박물관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 아래 갯샘 대바구 사내가 어슬러거린다. 나였다. 이우재 재가스님이었다. 곽 여신의 사위 우준서였다. 백년을 산 학, 곽학암 신선은 방생술로 홍주를 골랐다.
 왜 나는 그 찔레꽃 밤을 홀로 걸었을까. 여귀산에서 튀어 나온 오봉산 노루눈처럼 귀성(貴星)이 남극을 이룬 저 하늘 나의 여신은 따뜻하다.
 내게도 나만의 또 다른 신들이 있다. 대전 현충원에는 대한민국 호국신이 되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처럼 한 곳에 누워계신다. 가본지가 오래되었다. 두 분은 살아서도 돌아가셔서도 변함없는 강력한 신으로 자리하고 계신다. 봄이 되면 모두가 백조일손 푸른 잎사귀를 편다. 나의 아버지는 첨찰산 아래에서 소를 키우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흰 소 하나를 찾아 이 생을 다 바치는 업은 숭엄하다. 소는 진리이고 깨우쳐야 할 도(道)의 행(行)이다. 의신면 사천리 삼별초공원 입구 서남방에 사천저수지 건너 여귀산이 산연하게 다가온다. 돌아서면 첨찰산 옥순봉이 관세음보살 상호로 반긴다.
 내 어머니는 오월의 옥순처럼 고왔다. 자운 곽의진 의로워서 더 외롭고 뜨거웠던 여신은 첨찰산 석무골 소치에 미치고 말았다. 미치지 않는 여신은 없다. 구실잣밤나무처럼 마르고 또 말라 세로 빗금을 치며 버티던 그 산 아래 제 몸을 작대기 붓삼아 산수를 그렸다. 운림십경마다 방점을 찍고 운림각도(雲林閣圖)로 지팡이 하나로 드나들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눈물이었다. 꽃잎을 찧어 흐르는 그 눈물이었다. 사천(斜川)은 그렇게 모든 영화를 비껴 삼밭 영산 침계 매생이 바구독 돈지 창포를 지나 여귀산과 마주한다.
 누구나 자신 만의 신을 가슴에 섬긴다. 여귀산을 에워싼 많은 마을들은 창호(窓戶) 문살이다. 율려의 음통(音通)이다. 고산 장구포 매정 죽림 봉상 남극성 아래 귀성포, 호랑이굴이 있다는 여귀산 탑립 상만 국립남도국악원 선녀들이 구운몽을 꾸는 언덕 지나 구암사로 가 천년 비자나무에 스며든다. 가지마다 아이들은 매달려 웃음빗금을 달았다. 비구니들은 제 몸보다 정결하게 그림을 그리고 술을 빚었다.
  그대 탑리에 가면
 그대 봄이 지나면 탑립에 가 보라. 민춘란과 진달래도 산복숭아꽃도 다 지고 송화가루 흩날리는 오월이 뜨거워지면 찔레꽃처럼 탑립에 가 보라. 그냥 훅 하니 뜨겁게 흔들려보라. 달빛보다 더 하얗게 그 길을 걸어가보라.
 아직도 소요유를 즐기는 여신의 향그러운 발자욱을 따라가 보라. 여전히 성곽을 쌓고 있는 그 여신과 다시 내기를 걸자.
 진도는 동방의 아마조네스다. 북두칠성이 멤도는 마고성이다.
 가난과 젊음이 통과의례처럼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것은 아니다. 아기장수들과 여기급창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둠벙을 가 보았는가. 비오는 날 깊은 밤 그곳을 지나가 보았는가. 그 호연한 울음 한 소절을 담아온 적이 있는가. 절구통은 검푸른 물 속에 잠기고 도굿대는 무엇을 찧고 있는 것일까. 금갑포에서 제주까지 태평양 유구열도까지 흘러갔던 연화부 삼별초 병사들이 그 가난하지 않은 정신들이 단홍교 쌍홍교 남도석성 벽을 뻘기처럼 기어오르는 새벽을 한 번이라도 보았는가. 낮에는 담쟁이 잎으로 변장을 하고 다시 천년의 푸른 꿈을 입에 물은 별초들이 명량으로 동학년으로 그렇게 역사의 진군을 해왔다.
 내 할아버지는 석수쟁이였다. 할머니는 갈 곳없는 섬마을 노래꾼이었다. 먹바우골 서른 넷 구들장 논배미를 생전에 걸어보지 못했지만 할머니는 그곳에 누워 계신다. 누구나 신이 된다. 그 산에는 멧돼지가 많았다. 가을이면 까만 멀구나 돌담마다 주렁주렁 열렸다. 바깥에는 새삼물(정금) 열매가 침을 삼키게 했다. 둘째 형과 늦가을 잘 익은 차나락 벼를 벴다.
 나의 신 나의 조상님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는 또 다른 세월의 강을 가없이 건너가고 있는 것일까. 백수광부처럼.
 오늘도 여귀산은 솟아오른다. 경계와 두려움을 물리치며 마고성으로 솟아오른다. 자운은 대천사가 아니었다. 구자도 앞을 헤엄치는 인어는 더더욱 아니었다. 부러진 날개. 모든 인연들은 사슬이었다. 오봉산은 젖이 흐르지 않는 가슴이었다. 찔레꽃은 너무도 징그러운 과녁이었다. 학이 날아와 앉던 바위처럼 든든하던 아버지. 곽의신 여신의 햇살 곽학암 선생,
 가객 장사익은 “‘봄'자가 꽃이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지금은 봄이다. 세상은 한사코 봄이 아니라고 하지만 간나하고 낮은 집부터 울타리를 넘어온 봄 햇살이 수선화를 피우고 땅을 부풀어 올린다. 몸도 장사익처럼 자꾸만 솟아오른다.

 모든 봉수대는 활화산이었다
 시는 웅혼(雄渾) 충담(沖淡) 섬농(纖穠) 침착(沈着) 고고(高古) 전아(典雅) 등 24개의 특징을 갖는다고 했다. 삼국지연의 첫장 서시는 바로 그 영웅들의 웅혼을 장강에 비유했다.
 나의 시는 아무런 성루도 쌓지 못했다. 모든 소리는 맥놀이를 치지 못했다. 내 몸도 마음도 시대정신을 지키지 못했다. 제대로 가정도 건사하지 못했다. 내 자신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어머니는 목련처럼 지고 아내는 산철쭉인양 나를 감쌌다. 그래도 결국 새들의 섬 조도로 함께 재출발을 다짐했다. 곽의진 시인 여신은 천개의 거울이었다. 날마다 거울을 탑립과 강계 바다에 씻었다. 태평양을 건나간 천경작 그랬을까? 갯샘에서 날마다 길러온 그 거울들. 경자. 경자의 엽서그림들. 여신들은 다 거울이었다. 제 몸에 빗금을 치는 자작나무였다. 하얗게 문신을 새기는 찔레꽃이었다. 그 길이었다. 그 밤이었다. 걸음걸음마다 시의 구절이었다. 상처였다. 반성과 싸움이 엇박자로 풀섶에 스며들었다.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지나간 날들은 다 총알이었다. 화약은 다시 찔레꽃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날마다 찔레꽃잎에 시를 썼다. 모든 여신들의 숙명이다.
 나는 그 꽃잎 뒤에 소설을 썼다. 더 짧게 더 아프게 편지를 썼다. 아무리 찔러도 질러도 소리가 없는 편지글귀였다.
 나도 무덤이 되고 싶었다. 내려오지 않는 노루의 말고 까만 눈처럼 두려워하며 여귀산에서 살고 싶었다. 나도 차라리 무덤이 되고 싶었다. 노루털처럼 고운 잔듸로 덮여 눕고 싶었다. 사월이면 그래도 여귀산 춘란이 되고 싶었다. 샘물이 되고 싶었다. 

 뜨거운 날들은 반드시 온다.
 봄이 그냥 오겠는가. 나는 이미 봄이다. 인(忍)자가 백번 쌓인 조선의 바다. 그게 녹진바다에 펼친 일자진이다. 못 하나 박지 않고 혈의 맹으로 엮어진 판옥선이었다. 소소승자총통이었다.
 흐르지 않는 물결은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자운은 바다에 드리워진다. 여귀산은 씻김 어머니다. 모든 나무들은 사설로 묶어진 무가다. 그 노래들이 자운(慈雲)이다. 오월에서 유월로 찔레꽃이 핀 탑립 숲길을 걸어가면 아무리 깊은 밤에도 나는 더웁기만 했다.
 인천에서 왔던 홍성훈 선생 부부님도 이 길을 걸었다. 막걸리와 함께 시앙골 장의균 선배도 걸었다. 누구나 걸었다. 하얀 찔레꽃도 함께 걸었다. 동외리 소설가 정성숙씨도 걸었다. 달빛도 그냥 걸었다. 늘 ’꽃사슴‘으로 불렀던 쌍정리 정매자씨도 자주 찾았다. 누구나 걷고 누구나 달이 되었다. 찔레꽃이 되었다. 가끔은 산 칡꽃이 되어 숨기도 했다. 이내 죽림에서 건너온 아내는 푸른 가방을 들고 걸었다. 백세를 넘긴 곽학남 선생의 기목나무 가지가 된 팔뚝에 주사를 놓고 관절약을 제조해 건내주었다. 분화구를 담은 반달이었다. 오봉산에서 벌써 달려나온 달님이 동쪽으로 달리다 솔숲 사이로 빙긋 웃어주었다. 꽃은 피고 꽃보다 먼저 향이 피고 향보다 먼저 달이 드고 달보다 먼저 바다가 밀려와 또아리를 치던 자운토방. 그 토방은 해남 두륜산 일지암을 많이 닮았다. 차로 비유하자만 곽여신은 일창보다 이기(二旗)였다.
 당신이 있을 때 나는 궁핍하지 않았다. 쉬이 쓰러지지도 않았다. 후박나무는 후후 나를 다스리고 생달나무 구실잣밤나무 구자도로 고개를 숙인 동백나무.
 그녀는, 그 여신은 따듯한 뱀이었다. 뱀꽃처럼 징그럽고 아름다웠다.
 김완 시인은 팽목항을 다녀와 여귀산을 지나면서 ’바다속에는 별이 산다‘라고 침묵보다 더 깊은 잠언을 참언을 참회를 기억을 고통스런 상처를 마지막 희망을 노래하였다.
 모두가 밤을 걸어가면 스투파가 되었다. 차 한 잔의 향기만 멤도는 녹야원에 닿았다. 내 집에서 온 하얀 진돗개가 크고 있었다. 그도 달이었다. 밤이 되면 여귀산 자락 아래 오봉산밑으로 가끔 몰려오는 너구리들의 발길을 막아주었다. 훨씬 앞서 여귀산 상만마을에 이토 아비토가, 헌복동에 영국에서 온 문화인류연구가, 강계마을 사구미에 전경수 교수 등이 자리잡아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 나라와 자신의 미래에 치열하였다. 한 사람은 상가집을 찾아다니며 밥을 얻어먹다 간첩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80년 석달윤씨와 가족은 강계와 헌복동에서 수산양식을 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고 18년을 영어의 몸으로 살아야 했다. 장의균씨도 8년을 간첩으로 내몰려 교도소를 전전하였다. 금갑 활곡 등 수많은 진도사람들이 고문을 받고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자운선생은 성곽이었다. 새도 벌도 나비도 틈집을 짓지 못했다. 담쟁이 잎사귀같은 문장으로 뒤덮인 창연한 성곽이었다. 하루하루가 오방색의 매듭이었다. 스투파의 계단이었다. 마고성이었다. 사람은 죽어서 신이 된다. 발로 둥둥 밟고 또 밟을수록 다시 태어나는 신. 곽의진은 신이 되었다. 동백꽃이 다 지고 말아도 저 북은 가슴의 여신은 더 신비로워질 것이다. 탑립 돌탑 위에 고이는 샘물 한 모금을 마셔보라.
 누구나 자화상을 본다. 녹슨 거울을 닦아본다. 자운토방의 기왓돌을 갈아본다. 그 여신의 갈빗대를 부러뜨리고 싶다. 허물을 벗은 뱀과 같이 까만 칡순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
 꽃게는 가장 뜨거운 물 속에서 죽어서야 붉은 색을 내놓는다. 그녀는 꽃이 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허물따위를 끼어 입지 않았다. 새벽이슬같은 눈물띠위는 아예 맺지를 않았다.
 여귀산은 젖가슴이었다. 보덕관음이었다. 마고선녀였다. 오봉산은 찔레꽃같은 소음순이었다. 옥순(玉筍)이었다. 진도아리랑 구절구절이었다. 여귀산은 지어미였다. 어미호랑이였다. 한 때는 배중손의 칼이었다. 모든 바다가 으르릉거려도 하염없이 더 먼 이어도 유구바다에 초점을 맞췄다. 늘 지금이었다. 푸른 대나무가 그렇게 흔들어 깨운 산이었다. 찔레꽃 여신이었다. 신발도 머리빗도 없이 관음의 율려에 누운 여신이었다.
 곽의진은 여신이 되기 전 살아서 “75세까지만 살고 싶다. 유언장을 써 품고 다닌다”고 월간 ’사람과 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왜 75세였을까. 85세도 아니었다. 무엇에 맞추었을까? 그러나 누가 부르듯이 70세에 저 여신이 되었다. 왜 나는 그 산길에서 한 번도 달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을까. 바다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은 섬들의 불빛이었다. 구자도와 그 건너 보길도.
 벙구나무 잎이 피어나면 새들이 찾아왔다. 곽의진씨의 손주 손녀들이 찾아왔다. 서울은 멀지 않았다. 그리움이 더 멀었다. 우리는 때로 화보가 되고 바닷가 집이 되고 그 둘레를 도는 벙구나무잎이었다. 소나무를 베고 창을 내지도 않았다. 이미 바다가 와 있었다.

 오늘도 여귀산은 솟아오른다. 모든 편견과 내기와 같은 역사로부터 솟아오른다.
 잎사귀마다 바다를 품은 나무들은 소리내는 반야(般若)의 경전이다. 정좌한 수도승이다.
 모두가 꿈이었다. 이 세상은 오직 인연일 뿐. 강계에서 죽림 헌복동 탑립 귀성 남동 팽목까지 바다가 차오를때마다 여귀산은 솟아오른다. (*스투파) 스투파.(진도 박남인)

 죽고싶다 할 때 그 산 아래 바다를 껴안은 자운토방을 가보라. 삼십센티 작은 정방형 빗돌이 누운 그 묘지를 내려다 보라. 저 아래 바닷가 갯돌에 붙는 갈포래와 같은 두려움의 시간들을 떼어내면 듬부기가 온다. 아무리 동백꽃이 떨어져도 사월은 가고 오월은 온다.
 사람은 가고 그림움도 가고 오월이 오면 오월이 다 지나갈 쯤 찔레꽃이 피는 그 길을 걸어가 보라. 찔레꽃처럼 그렇게 더웁게 향을 품어 보았는가. 모든 꽃들은 유언장이다.

                                                                      동백나무 앞에 누운 자운 곽의진과 바다

 그립다 하면 그립지 않고
 저 속절없는 사월의 들국화.

 “꿈이로다 畵緣일세”
   자운 곽의진

 누군가를 예찬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자칫 나를 높이는 장치의 격을 숨겨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간결하자. 더 간결하자. 담백하자. 깨끗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그 모든 잘못에 덧칠을 해온 삶이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나를 바로 세울 때마다 나는 쉬이 막걸리를 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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