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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주민들은 아직도 '세월호' 현재진행형…
진도주민들은 아직도 '세월호' 현재진행형…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6.1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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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차 등 수산어민 손실보상 소송

 
  


 진도 맹골수로에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7년이 흘렀으나, 사고 현장 인근 주민 속앓이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한 어민은 "선박 인양 과정에서의 유류 오염으로 매출에 타격을 입었다"며 대전지법에 정부 보상을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전지법 행정1부(이헌숙 부장판사)는 이날 오전 전남 진도 맹골군도 어촌계 주민 A씨가 해양수산부 4.16세월호참사 배상 및 보상 심의위원회(세월호 배·보상 심의위)를 상대로 낸 세월호 인양 유류오염 피해어업인 손실보상 청구 소송 첫 변론을 진행하였다.
 맹골군도 어민 "선체 인양과정때 유류 오염으로 매출 타격"
 바다에서 인양해 목포신항에 놓인 세월호
 맹골군도에서 미역 양식 등을 하는 A씨는 "2014년 침몰한 세월호 인양 과정에서 선박유가 유출되면서 해양이 오염됐고, 이에 따라 미역 채취량도 큰 폭으로 감소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선박 유류오염에 따른 피해 추산액은 5천만원 정도라고 A씨는 보고 있다.
 정부는 그러나 해경 방제기록 등 선체 인양 당시 유류오염 발생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보상에 난색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의 유족을 생각해 당시 저희는 보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며 "생업이 황폐화했는데, 방제 기록이 없다며 보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항변했다. 특히 2017년 선체 인양 과정에서 유류 오염 등으로 매출 손실을 입은 어민들은 신고한 피해액 중 9분의 1만 보상받아 속앓이를 하고 있다.
 앞서 서울고법 등에서 유사한 취지로 진행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어민들이 패소했다.
 4년 전 선체 인양 당시 유류오염 피해를 본 어민들도 아우성이다. 어민들이 신청한 손실액은 40억7000만 원이었으나 실제 지급된 보상금은 11% 수준인 4억5000만 원에 불과했다. 맹골군도 어촌계장 박병일(44) 씨는 “47가구의 자연산 미역 채취량이 2017년과 2018년에 예년의 20∼30%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피해 신청이 기각됐다”며 “당시 상하이샐비지 측과 군청 직원이 피해를 둘러보고 갔는데, 정부는 해경 방제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보상을 해주지 않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정부에서는 세월호 진상 재조사에 집중하겠다면서 정작 현장 직접 피해자인 수산어민들에 대해서는 소홀한 방제시스템 기록부재를 핑계로 재판부가 보상문제에 조도 어민들의 입장을 외면하고 있어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이며 바다인가”라면 분통을 내보이고 있다. 참사가 일어났을 때 학생 등을 가장 먼저 구조에 나섰던 이들이 동거차도, 맹골도, 관매도 어민들이었다.
 동거차도 한 어민은 "세월호 침몰 당시 구조에 가장 앞장섰는데 기름 피해를 입었고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당시에는 참사의 아픔이 너무나 커 목소리 한번 내지 않았는데 인양과정에서도 또 피해를 입어 생계에 큰 타격을 받았다"며 "양식장 피해 보상 협상에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 주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진도군 동거차도 어민 이모  정진배(동육리)씨 등 6명은 "침몰한 세월호에서 새어 나온 기름으로 양식장이 오염돼 그해 양식을 망쳤다"며 정부에 피해 보상을 요구했으나, 법원은 손실액 사정을 위한 법령 미비 등을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박종호 기자)

 

<짭짤한 해초상식>

임금 진상품, 혼수품으로 쓰던 진도 돌미역
먼바다 돌섬 거센 물살서 자생식감 단단하고 깊은 맛이 특징맹골도·곽도…조도産 '최고'전통 채취법 국가어업유산돼긴 가닥 오롯이 전해 장수 기원산모용, 값 깎지 않는게 불문율 고려시대 신하에 미역밭 하사세금·소작료 부과하던 시절도요즘엔 어촌계 공동채취·분배◆돌미역의 습속중국 당나라 때 서견(徐堅·659~729) 등이 지은 백과사전 '초학기(初學記)'에는 '고래가 새끼를 낳은 뒤 미역을 뜯어 먹어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고려 사람들이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고 했다. 송나라 때 사신으로 온 서긍은 '고려도경'에 '미역은 귀천이 없이 널리 즐겨 먹고 있다.'라고 했다. '고려사'에는 원나라에 미역을 바쳤다는 기록과 신하에게 곽전을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여성의 풍속을 기록한 '조선여속고'(1927)에는 '산모가 첫국밥을 먹기 전에 산모 방의 남서쪽을 깨끗이 치운 뒤 쌀밥과 미역국을 세 그릇씩 장만해 삼신상을 차려 놓는데, 그 밥과 국은 반드시 산모가 먹었다'라고 했다. 예부터 산모가 아이를 낳고 처음 먹는 미역국을 '첫국밥'이라 했다. 이때 사용하는 미역은 오리(가닥)를 꺾지 않고 보관한 긴 가닥의 '해산미역'이다. 상인에게 구입할 때는 값을 깎지 않았고, 산모에게 줄 때도 가닥을 오롯이 전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의미였다. 이렇듯 돌미역은 고래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귀하게 여겼다. 돌미역 중에서 전남 진도군 조도면 독거도, 맹골도, 곽도 등에서 자라는 미역을 최고로 꼽았다. 딸이 결혼을 하면 혼수품으로 조도 미역을 준비했는데, 이를 '진도곽'이라 불렀다.

 ◆돌미역은 화폐였다 돌미역이 자라는 곳은 먼 바다 거친 파도 사이에 있는 돌섬들이다. 조선시대에는 미역이 바다에서 나는 것 중에 재산 가치가 높아서 '곽전(미역밭)'이라 불렀다. 이들 섬 주변에는 바닷물이 거칠게 흐르고 빠르다. 이런 바다에서 자라는 미역은 줄기와 잎이 가늘고 길며 질기다. 특히 미역섬으로 유명한 조도군도에는 무려 150여 개나 몰려 있다. 그래서 섬과 섬 사이로 바닷물이 빠르게 흐른다. 작은 섬에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미역 때문이란다.  미역바위의 크기에 따라 논과 밭처럼 세금을 부과했다. 그래서 힘이 있는 권문세도가들은 국가 재산인 미역바위를 차지하고 어민들에게 땅처럼 소작료를 받기도 했다.
 서남해의 절해고도 맹골삼도(맹골도·곽도·맹골죽도)는 15~16세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해남윤씨가에 미역·전복 등을 공납했다. 1940년대에 이르러 주민들이 매입해 섬 주민의 미역밭이 되었다. 동해, 서해, 남해, 그리고 제주까지 어민들은 봄과 여름 사이에 미역을 뜯어 말렸다가 뭍에 팔아서 쌀도 사고 생필품도 구입했다. 미역바위는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채취해서 나눠 갖는다. 최근 수온 상승과 갯녹음 등으로 미역밭도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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