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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책 / 박남인의 소요(逍遙)기
운림산책 / 박남인의 소요(逍遙)기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7.2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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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저명한 민속학자인 나경수 씨는 최근 「진도」(珍島. 민속원)라는 저서에서 『진도지역의 지정학적 배경과 민속 문화적 대응』이라는 부제를 달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책의 한 부분에서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라고 기쁘게 토로한다.

그는 또한 ‘진도의 문화는 아이러니와 함께 한다.’라고 학자로서 깊이 연구하고 규정했다. 진도는 한국 사회에서 지정학적으로 수도권(정치지배권)으로부터 가장 먼 곳이지만 오히려 수많은 전란 속에서 격전지가 되었다고 강조한다. 진도의 동백꽃이, 소포 걸군 고깔꽃이 왜 그렇게 붉게 피어 달려있는지 떠올리게 된다.

진도사람들에게서 ‘진도’라는 말은 엄청나고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같은 섬이라지만 ‘완도’나 신안, 그리고 해남이라는 지리적 용어와는 크게 다른 반향과 애착을 갖게 한다. 최근의 ‘송가인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문화적 정서를 빼고는 제대로 설명이 안 된다. 그의 어머니 송순단씨의 얼척(?)없는 행위와 의식 속의 모녀 관계는 그들이 아직도 어떻게 진도식의 ‘문화적 대응’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실마리를 찾는 단서가 된다.

지산면 앵무리라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송순단(61)씨와 가수 송은순씨. 서민들의 애환을 붓으로 세상을 흔들었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분인 단원(사능) 김홍도는 경기도 안산의 갯마을 성포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스승 표암 강세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단원고의 학생들이 제주도로 가는 여객선을 타고 진도 맹골수도에서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여 꽃다운 수많은 목숨을 잃게 되었던 사고는 진도의 또 다른 ‘지정학적’ 인연의 업보를 보는 듯만 하다. 7년이 지났지만, 진도에서는 송순단(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 72호 전수 조교)을 비롯해 예능자, 보존회원들은 당연히 해주어야 할 굿을 내놓고 하지 않고 있다.

                                                                                                    벽파정

송가은의 고향을 찾는 전국의 수많은 팬들은 그 마을 앞이 개펄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낙지를 잡고 바지락을 캐며 진도 소리를 불렀을 송순단 여사는 그 인생 여정은 얼척없이 힘들었겠지만 한마음 다잡아 인기를 누리고 ‘진도 여자와 살면 한 살림 그저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속담처럼 진도 여자들은 누구보다도 억척스러운 성정을 내보인다.

780년 전 삼별초 항쟁의 중심에서 끌려가 아득한 초원의 땅으로 끌려가 살다 돌아온 진도사람들. 임진왜란 당시 명량대첩의 이면에는 진도 여자들의 목숨을 건 적극적 참여와 성원이 민속학적으로 승화되어 진도 강강술래와 진도만가놀이 호상꾼 역할을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왜덕산 전설과 정유재란 순절묘역의 수많은 죽음을 위로하고 묻어주는데 당시 진도 여자들의 몫은 엄청난 것이었다. 진도의 상장례 문화는 당연히 여성들이 주도하는 민속이 된 것이다.

오늘날의 남도 수묵화 문화를 장착시키고 부흥케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이견이 없이 소치 허련 선생을 앞세운다. 그의 후손도 화가로서 5대를 이어가고 있지만 진도 출신 화가, 서예 작가들이 전국대회 특선입상한 전업 작가가 수백 명이 배출된 지역은 오직 진도만이 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그런 문화 바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허 소치는 당시 나이 오십 세에 도성의 문화 르네상스를 벗어나 과감하게 귀향을 선택해 진도 첨찰산 아래에 조그마한 화실(雲林閣)을 짓고 살았다. 스승 추사 김정희는 세상을 풍미하던 완당바람을 뒤로하고 ‘산숭해심’(山崇海深)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소치는 평생 세속의 부와 명예에 연연하지 않았다. 또 한 분의 스승이자 꿈의 인연이었던 두륜산 일지암 초의선사의 그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선풍 소식을 얻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요즘 말로 치자면 전 국민에게 트랜드로 떠오른 ‘자연인’의 남도의 비조 중의 한 분이 소치 허마힐이었다. 그에게도 깊고 지울 수 없는 시련이 없지 않았다. 그토록 아끼던 큰아들로 애제자이기도 했던 미산 허은이 요절한 것이었다. 소치는 진도사람들의 여덟 가지 변속을 한탄하였지만, 그 자신도 운림산방 앞에 존경하던 집안 형님의 묘소를 쓰게 하였으며 그는 고군면 황조마을 부근 선산에 묻혔다. 살아서 운림동 석문을 오가며 송대의 시인 나대경의 ‘산정일장(山靜日長)을 읊으며 배롱나무 가지처럼 세속의 무게를 비욱 산책을 즐기며 연운 공양 조식으로 미수(米壽)에 다다르게 천수를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진도에서 산다는 것은 누구나 ‘자연인’으로 되돌아가 사는 철학을 나누는 것이다. 소리는 경전이자 향약이었다. 진도사람들은 수천 년 그들만의 원시공동체 사회를 구축하며 사람 간의 높낮이를 허물어낸 민본주의를 구현하며 이상향을 만들고자 했다. 고된 일속에서도 선조들은 유배자들에게 서당을 열어주었으며 글과 그림을 즐겨 배우고 아꼈다. 이런 바탕에서 의도인 의재(毅齋) 허백련과 소전(素全) 손재형이, 대금국수 박종기와 무송(舞松) 박병천이 민속예술계에 걸출한 거두요 명인으로 자리 잡게 되어 오늘의 ‘진도’를 이룬 것이다.

조도만두나무처럼, 진돗개처럼, 거센 물결속의 진도곽처럼 진도가 무엇보다 진도다우려면 ‘서울식’이 아닌 다시 ‘오래된 미래’ 블루아일랜드 청정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들장논, 초가집 하나 없는 운림 예원, 아리랑 마을은 문화적 근거와 민속의 접근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정책을 입안할 때 수도권 민속촌 아류를 따르려 하는 습성에 있다. 이제 진도군수는 스스로가 노란 울금바아 마플로 장가, 풍란 볼매수, 검정쌀바, 춘삼월 봄동바, 여귀산 동백단이 가시내같은 진도 ‘자연인’이 되어야 한다.

주말 나들이 같은 ‘그들만의 구원’ 의식보다는 명량을 지키다 가신 조상님과 ‘민족 해원’을, 화려한 성장보다는 나눔과 상생의 담장 없는 무릉도원의 옥주(沃州), 진도를 제시하고 솔선하며 이끌어갈 신명이 가득한, 사이다보다 진한 흑미울금차같은 새로운 지도자가 우리 앞에 나설 것임을 당당히 기대한다. “우리는 자연인이다. 한국 민속 민중문화의 맷돌 숨결과 손떼가 묻은 어처구니다!”

이제 달빛에 젖은 설화 스토리텔링이 남도의 햇살과 파도에 씻겨온 우리들의 삶이 빛나는 역사가 되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박남인 도행)

*다음호에는 ‘자연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두 번째가 나갑니다. 늘 관심과 애정을 주시는 강호제현들의 일독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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