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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우기고 /   대통령후보선출에 따른 당내결선투표
향우기고 /   대통령후보선출에 따른 당내결선투표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10.2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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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학박사 강재수 용산출신

결선투표란 과반수를 얻은 후보자가 없을 때 상위투표자 2명을 놓고 다시 투표하는 제도이다. 당선자의 대표성을 높이고 사표를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선거를 두 번 치러야 하고 승자가 바뀔 수 있는 속성상 변동성과 역동성이 심해 결과를 예단하기 쉽지 않다. 이번 더불어민주당 내 대통령후보자 선출을 위한 제3차 선거인단 결선투표가 실시된 결과를 두고 이재명, 이낙연 후보가 첨예하게 맞섰다. 이 후보자가 전체 투표결과 50,29 %를 얻었지만 중도사퇴후보의 득표를 합치면 49,3 %에 그쳐 결선투표를 해야 한다는 이낙연 후보 측 주장 때문이다. 자칫 법정공방까지 갈 수도 있지만 일단 이낙연 후보가 결과를 겸허이 수용한다고 선언해 일단락되는 듯하나 이낙연 후보의 지지자들은 경선결과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는 1971년 4 • 27 치러지는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제1야당 신민당내 대선후보경선 결선투표가 유명하였다. 당시 40대 기수론을 내건 김영삼 후보가 1차 투표결과 승리했지만 과반수 획득에 미치지 못해 차점자 김대중 후보와 결선투표결과 승부가 뒤집혔다. 1969,10, 17 국민투표에 의거 3기연임이 가능하게 된 헌법개정으로 1971년의 제7대 대통령선거에 박정희 현 대통령이 민주공화당 후보로 확정되면서 이에 맞서 제1야당 신민당에서는 당내 40대 기수론을 제창하고, 박정희 대통령에 맞설 후보라며 김영삼 원내총무는 유진산 당 대표의 추천을 받아 69,11,8 제1야당의 대통령후보지명전에 나설 것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김대중은 1970, 1, 23 전당대회 대의원 256명의 찬성서명을 얻어 대통령후보지명발의서를 당에 제출하였고, 이철승 정무위원 또한 지명전에 의사를 표명했으나 유진산 당대표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사퇴를 선언한 후 지지자들과 1차 투표에서 단체로 백지투표를 던져 무효표를 대량 발생시켰다. 이에 두 사람을 놓고 1970, 9,29 서울시민회관에서 임시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후보 지명전 투표가 실시되었고, 김영삼 김대중이 대결한 결과 1차 투표에서 재적 885표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로 두 후보 모두 과반수 득표에 미달되어 2차로 결선투표를 실시했는데 재적 884표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1차 투표의 백지투표에서 대량무효표는 16표로 줄어 이철승 계보의 지원을 얻은 김대중이 승리하였다. 이로써 여야 간 후보가 확정되자 여당은 이번 선거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다며, 즉시 김대중 후보를 꺾기위한 선거 전략으로 영남지역감정에 불을 지르는 지역분할술책을 필승전략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하였고, 야당은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참겠다. 갈아 치자. 는 선거구호를 외치며 격돌했으나 제7대 대통령선거결과 박정희 후보는 53,2 %, 김대중 후보 45,3 %로 946,928표의 근소한 차이로 야당은 패배하였다.

위 야당의 당내경선은 우리나라 근 현대정치사에 대통령 후보자선출을 위한 결선투표의 표상으로 유명하다. 김영삼은 27살 약관의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DJ는 1961년 겨우 강원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뒤이은 5 •16군사혁명으로 당선 3일만에 의원직을 잃었고 절치부심 후 1963년 YS와 두 사람이 비로소 신한민주당에 입당하고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김대중과 김영삼은 처음으로 영원한 숙적 리이벌 관계가 시작되는데 원내총무를 놓고 첫 번째 대결에서 YS가 승리한 후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40대 기수론의 등장으로 김대중이 여기에 합세하면서 김영삼 김대중의 두 번째 대통령후보자 선출을 위한 당내지명전 대결이 펼쳐지고, 이번에는 김대중이 역전극을 벌이며 승리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숙명적으로 라이벌 관계가 유지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도는 프랑스를 비롯 러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체코, 폴란드, 칠례 등 131개국 세계 여러 나라 국가에서 채택되고 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0번의 대선결선투표에서 승자가 세 번이나 바뀌는 이변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상 이재명 대 이낙연의 최종 투표결과에서 특히 호남지역 국민, 일반당원선거인단의 투표결과를 주목해 본다. 전남, 광주의 경선결과 1위 이낙연 47,1 %(3만3,848표), 2위 이재명 46,9 %(3만2,726표)로 투표결과 겨우 122표 0,2 %포인트 차이밖에 안 되었다. 전북의 경우도 이재명54,55 %, 이낙연 38,48 % 이었다. 투표율 또한 전남, 광주의 경우 40,29 %에 불과하다. 필자는 굳이 Localism(지역주의)를 내세우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DJ 이후 전북에서 정동영 후보를 제외하고, 전남지역에서 대통령후보자로 여당이나 야당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었던 인물이 과연 누가 있었던가? 제13대 대통령선거의 경우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후보가 격돌할 때 호남인들은 김대중 후보에 90 %를 지지해준 기록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 경선에서 광주, 전남, 전북에서 몇 % 만큼이라도 이낙연후보자를 지지해 주었다면 이번 민주당의 당내 경선결선투표결과는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토종 호남인이다.

2021, 10 21

임회용산출신 전 국가공무원 부이사관

정치학 박사 강재수(010-3715-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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