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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11.1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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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사고에 대한 유감

                                                                                              정성숙(전남 진도 농부. 소설가)

벼 타작을 할 때마다 논 모서리 벼를 베지 말라고 남편은 내게 당부한다. 그깟 것 몇 푼이나 되냐고. 벼 타작할 때는 새벽 5시쯤 집을 나서서 일을 시작해도 밤 10시가 넘도록 시간이 빠듯하다. 전날 건조기에 말려 놓은 나락을 꺼내면서 콤바인 청소를 한다. 콤바인 청소는 남편의 영역이지만 같이 거들어야 빨리 끝낼 수 있다. 이슬이 내리지 않았으면 콤바인 기름칠을 하자마자 나락 꺼내는 일은 중단하고 곧바로 논으로 달린다.

9시 전에 남편이 콤바인을 끌고 논으로 들어간다. 타작을 일찍 시작했으니 밤 10시 전에는 집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나도 낫을 들고 논으로 들어간다. 사방 귀퉁이 벼를 낫으로 많이 베 줄수록 남편이 하는 콤바인 작업이 더 수월하다. 콤바인이 논 두 바퀴를 돌 즈음에 톤백을 잡으러 절뚝거리며 뛰어간다.

톤백을 잡아주는 사람이 대기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앞뒤에서 살펴야 나락이 길바닥에 쏟아지는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나락 타작을 할 때마다 무사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남편이 타작한 나락을 톤백에 쏟아놓고 콤바인을 돌려세우자 나도 서둘러 다른 논 귀퉁이로 뛰어가서 벼를 베는데 끼익! 하는 콤바인 비명 소리가 난다. 돌아보니 콤바인에서 연기가 난다. 낫을 들고 콤바인이 멈춰 있는 곳으로 뛰어간다. 마음은 뛰고 있지만 실제 발은 절뚝거리며 큰 걸음으로 걷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숨은 가쁘다.

벼가 쓰러진 곳을 베다가 벼 포기가 뽑혀서 콤바인에 들어가면서 앞 부문이 꽉 막혔다. 남편과 같이 콤바인 체인에 뭉쳐 있던 짚을 빼내는데 금세 30분이 지났다. 남편이 운전하는 콤바인이 이제는 조심조심 저속으로 기면서 나락을 베어간다. 나도 숨을 몰아쉬며 다른 논 귀퉁이로 간다.

벼 타작을 할 때는 분 단위를 세면서 뛰어다니게 된다. 대략 10~15분이면 콤바인 탱크가 가득 찬다. 그 사이에 다른 논 귀퉁이 벼를 베다가 뛰어와서 톤백을 잡아줘야 한다. 남편은 귀퉁이를 베지 말라 하면서도 콤바인 조작 실력은 변함이 없다. 논바닥에 쏟아지는 낟알을 차마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콤바인으로 1분 정도 지나가면 베어지는 벼를 30분 동안 낫질을 하는 셈이다.

논 모서리를 콤바인이 돌면서 조작 미숙으로 깔아뭉갠 나락을 다 합친다면 한두 가마나 될까? 일주일 내내 뒤뚱거리며 뛰어다닌 수고에 비하면 별 거 아닌 것 같다. 계산상으로는.

남편이 콤바인으로 논 모서리에 있는 벼를 베는 과정에서 바퀴에 짓밟히는 나락을 보고 있으면 속에서 불이 난다. 20년 넘게 콤바인을 다뤘으면 이제는 잘할 때도 됐구만! 하는 생각이 앞선다. 끼니 때 마지막 숟가락의 밥은 씹으면서 일어나 곧바로 타작을 하는 남편의 고충은 뒷전이 되고 만다.

콤바인이 미처 베지 못한 논둑 밑에서도 나락이 제법 나온다. 모내기 후에 바람에 밀려 자리잡으면서 여문 이삭들이 다른 나락보다 실하다. 공간을 넓게 차지할 수 있어서인 것 같다. 4면을 돌면서 벤 벼를 콤바인에 올려준다. 몇 푼을 건진다기보다 그냥 아까워서 관성처럼 몸이 움직인다.

어쩌면 농사꾼에게 합리적 사고란 사치가 아닐까 싶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나 생명과 곡식을 가꾸는 일이 이성에 의한 판단으로만 가능한가 말이다. 오히려 비합리적 노력의 총체가 아닐까? 타작이 끝난 논에서 이삭을 줍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일이다.

다 키운 농작물을 갈아엎는 사건을 자주 겪게 되고 밥 한 공기가 껌 한 통보다 못한 가격이지만 포기할 수 없다. ‘그깟 몇 푼’을. 곡식은 농사꾼의 인격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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