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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를 다시 보자
무궁화를 다시 보자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11.1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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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는 누가 부르는가/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누가 애국가를 부르는가/ 누가 애국가 노랫말을 지었는가/ 삼천리는 무궁화 산천인가

권정생 어린이문화재단 대표이사 박연철 변호사. 우리 시대가 닦아낼 스크린 도어를 열어젖혀 진도개처럼 애국가 가사를 물었다.

무궁화는 어디에서 피는가? 왜 민들레나 진달래 목련꽃 오천만이 사랑하는 개나리꽃도 아닌 샤론의 장미는 에덴의 동산에도 없다.진드기만 달라붙는 가을의 꽃을 누가 나라꽃이라 불렀는가. 청국 외세에 맞서는 자주정신 남산의 소나무 철갑을 두른 애국가 윤치호인가 도산 안창호인가? 박연철 ‘정평’ 대표 변호사는 먼저 애국가에 대한 장문의 질의서를 썼다

겹겹의 민들레 꽃잎으로 아무르에서 만주까지 불리던 독립군가.

왜 우리에게 진달래는 나라꽃이 되지 않는 것인지 농사도 정부도 정책도 외교도 오직 대안으로만 일관하는 저 유리창 밖의 신세계 이단자들 가난한 이웃 가난한 시인 우리들의 몽실이 언니 십일조 헌금함에 갇힌 우리들의 하느님.(민들레 아저씨-박연철)

내 땅에서도 가난한 영토에서 무료 변호사로 해마다 약속을 피우는 민들레처럼 박연철 선생은 저 하얀 머리칼 바이칼호 눈빛으로 이제 애국가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민들레처럼 불러야 한다.

나라꽃은 배달겨레의 꽃이 되어야 한다. 다까키 마사오와 유달영 청와대 박사, 수입산 군국주의와 천박한 괴물 자본주의 대량생산 통일벼 밀정 같은 생리 뽑아내 사해동포를 널리 이롭게 하는 꽃 나라를 팔아먹은 자가 독립군을 잡아먹은 진드기가 아직도 달라붙은 무궁화꽃.

나는 민들레의 봄을 기다린다. 권정생 님의 저 낮은 종소리 사월도 버려진 땅에 기어코 피어나는 꽃. 민들레는 배고플수록 제 땅을 지키는 일만 년 민중 겨레의 꽃. 천지간에 햇살이 넘치는 그 어느날 한 자루에 한 송이만 피는 꽃;

우리 민족의 봄을 알리는 꽃을 찾자. 남해 창망 섬 섬 민들레를 찾자. 현재 우리에게 익숙하게 불려지고 있는 애국가(국가는 아니다?)에 대해 일각에서 친일파 윤치호를 들먹이는 자들이 있다. 박연철 ‘정평’(정의와 평화) 대표이사 박연철 변호사와 임진택 창작판소리 명인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반증하고 있다. 나는 수년 전 미국에서 복간된 ‘사상계’에 실린 박연철변호사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애국가 가사저자에 대한 의문을 실은 장문의 논문이었다.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금 우리 애국가에는 두 가지 은폐된 진실과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이 있다. 은폐된 진실의 하나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심각한 수준의 친일파이자 친나치 부역자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철저히 숨겨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임에도 끝까지 감춰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이다. 세간에는 윤치호 작사설이 우세하지만 임진택 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 정기를 되찾고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음은 임진택씨의 글을 일부 옮긴다.

1.'한국애국가'는 도산 선생에게 바치는 헌사(獻詞)이다  '안창호 작사설'을 증빙하는 유력한 증거로 1945년 10월 김구 주석이 기록하여 남긴 '한국애국가' 악보집 주석(註釋)에 주목한 바 있다. 나는 이 김구 주석의 주석(註釋)이야말로 증거법상 전문증거 수준을 넘어 인적증거나 물적증거로 수용되어도 될 만한 중요한 증거자료라고 판단하고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중국에서 발간된 악보집 '한국애국가'에는 현행 애국가의 가사와 악보가 실려있고, 김구 주석(主席) 인물사진 밑에 '한국애국가의 고사(故事)'에 관한 주석(註釋)이 달려있다. 이에 관해서는 '흥사단'이 창립 100주년을 맞아 펴낸 '애국가와 안창호'(오동춘·안용환 共著, 2013)라는 책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거니와, '안창호 작사설'의 대표 주창자인 오동춘 박사가 한문으로 된 이 글을 이미 한글로 풀어놓은 바 있다.

김구 주석이 기록한 '韓國愛國歌的故事'에 나오는 '한국애국지사'가 윤치호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어불성설이다. 광복은 되었으나 미·소 양군이 3.8선을 갈라 한반도를 분할하고 있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귀국하여 독립정부를 세우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이라고 맹세하고 있던 김구 주석이 친일민족반역자의 대표 격인 윤치호를 아쉬워하는 마음에서 '한국애국가' 악보집을 펴내고 주석(註釋)을 달았다? 이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결론, 1945년 김구 제(題) '한국애국가'에 실려있는 '한국애국가적고사'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이자 초대 국무총리 대행이었던 도산 안창호가 자신이 지어놓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사의 '무궁화가2'가 국가(國歌)를 대신하게 되매 자신의 작(作)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을, 1945년 해방이 되어 환국을 서두르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主席) 김구가 만고의 애국지사 도산 안창호를 사모하며 <한국애국가>로 명명하여 헌정한 통한의 애도사였다. 

2. 주요한이 기록한 김동원과 안태국의 전언(傳言)에 애국가 작사자 문제의 답이 있다. 시인이자 언론인인 주요한은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벌어졌던 1955년 4월, 경향신문에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는데, 그 글 안에는 다음과 같은 색다른 전언이 들어있었다. "일설에는 당초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라는 가사가 윤치호 씨 원작인데, 나중에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도산이 경술(庚戌) 직전에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특히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실시할 때에 윤치호 씨를 교장으로 모시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혹은 그 시절에 안창호·윤치호 양 씨의 합의로서 새로운 가사를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대성학교 대리교장으로 있은 도산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보시라"고 청하였다.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놓았던 것을 꺼내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 되었다고 찬성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샤론의 장미는 무궁화와는 무관하며 아욱과의 꽃으로 흔히 ‘샤론의 수선화’로 불린다. 우리나라 일부 목회자들이 번역하면서 무궁화라 해 우리 민족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견강부회 주장을 펼쳐 이단적인 입장으로 정통 해석으로 하지 않는다.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선정한 것은 1896년 독립문 주춧돌을 놓는 의식 때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을 넣으면서 나라꽃이 되었다고 한다. 무궁화는 한국에 토착화된 식물이 아니라 구한말 이후 일본에서 이식됐다. 지배층의 보급 운동으로 유지되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상징을 독점 지배하다시피 하는 꽃인데 원산지 따질 이유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한국이 원산지 식물은 개나리를 비롯해 69개 종이 된다. 무궁화 예찬 일본 문헌을 그대로 직역 일본을 한국으로만 바꾼 내선일체식 세뇌주입, 한 나무서 오랫동안 피고 지는 생명력은 일본이 무궁화를 사무라이 지배엘리트 층의 얼로서, 혼네(속마음)의 진짜 나라꽃으로 숭상하는 이유다. 시대의 무거움은 유신독재와 신군부독재의 여운이 너무 길게 오래 계속되고 있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시작되고 21세기 대명천지 세상이 되었는데도, 강산이 여섯 번 바뀌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이렇다 할 무궁화 국화 자격에 대한 회의론을 찾을 수 없다. 무궁화에 진딧물만 꼬이는 게 아니었다. 국내 무궁화 텍스트 저자들은 어용 관변학자와 동화작가나 번역가만 있을 뿐, 정상적인 전문학자는 찾을 수 없다. 권력층의 입맛과 주문에 따라 일본 무궁화 품종의 도입과 복제와 무한 복제와 인문 사회지식으로 무궁화를 날조해왔다. 그들이 기댈 곳은 일반 국민의 무관심과 잘못된 상식의 관성의 법칙뿐이다.

경술국치(1910년) 이전 1908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한 도산 안창호가 윤치호 씨를 교장으로 모시고 자기는 대리교장을 맡아 했다는 것. 도산과 윤치호가 만나 이 같은 대화를 나눈 곳은 평양 대성학교에서였다.  그 뒤부터 애국가는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나이와 경력, 사회적 지명도에 있어 당시 윤치호는 문명개화에 영향력 있는 선배어른 격이었고, 안창호는 민족운동 중심에 있는 청년후배군(群)의 대표 격이었다. 10여 년 전(1896년~97년경) 윤치호가 독립협회 요직을 거쳐 회장을 맡은 시기, 안창호는 열아홉 살 나이로 막 상경하여 독립협회의 신출내기로 참가하였다. 그러한 안창호가 10년 만에 무시 못 할 민족운동가로 성장하여 미국에서 막 귀국한 것이다. 

윤치호와 안창호는 선후배 간이면서 상호 보완관계에 있는 협력자였다. 안창호가 윤치호에게 '황실가(무궁화歌1)'의 본가사를 시대에 맞게 새로 고쳐 짓자고 제안한 것은 물론 '무궁화歌'가 당시 많은 애국가류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애국가'로 널리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애초 '무궁화歌1'의 창작과 보급에 두 사람이 처음부터 공동으로 관여되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 도산이 이처럼 자기가 지은 가사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한 배경은 당시의 시대 상황이 이 같은 합의와 묵계를 필요로 하고 또 용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청년 안창호는 한 나라의 '애국가'로 불리울 수도 있는 노래를 자기같은 한미한 사람 이름으로 내게 되면 온 국민이 합심하여 부르기 어렵게 될 수 있음을 염려했고, 또 당시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분과 활동을 되도록이면 감춰서 일제의 탄압을 피하려는 심려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안창호가 자신이 미리 써둔 새 가사가 있었음에도 윤치호에게 새 가사를 지어줄 것을 청한 데서도 드러난다.

조도만두나무

 

진도의 군조는 여전히 백조가 되어야 하는가? 이 또한 일제의 잔재다. 나무도 기왕 후박나무라면 조도만두나무처럼 아열대식물공원을 조성하자. 동백꽃은 제대로 피게 하자.(편집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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