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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않은 길을 위하여 - 낮은 사회 서민의 합의를 반드시 거쳐야
 가지 않은 길을 위하여 - 낮은 사회 서민의 합의를 반드시 거쳐야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12.0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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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세계에서 결코 평탄한 삶에서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걸작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시련 속에서 늘 부단한 성찰과 내재율의 부족함, 그리고 반드시 먼저 다가오는 고난과 역경은 신이 내린 최고의 축복이라고 한다. 여름철에 태평양에서 점점 세력을 키우면서 북상하는 태풍처럼 동토를 뚫고 올라오는 봄꽃들의 에너지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다. 야생의 붓꽃처럼.

진도는 겨울에도 푸름과 파랑이 넘친다. 연두빛 그리움으로 봄비가 오니 이산 저산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수선화와 개나리 진달래는 반드시 추위를 거쳐야만 꽃망울을 맺히며 저마다의 고유한 색과 향을 얻는다. 시인과 예술인들은 이를 깨닫기까지 다양한 경험과 체험과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섬의 한 가운데 길은 끊기고 운림산방에는 수많은 사연과 인연 그리고 명작의 산실로 200 여 년의 문화의 숨결이 숨쉬고 있다. 때로 누락한 시대의 준엄한 절명의 시(매천 황현)가 이곳을 배회하며 발길을 돌리게 하고 나대경의 산거(山居)로 운림각도를 가득 채웠다. 그렇게 소치는 49세에 스승없는 세상과 결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와 배롱나무에 붉은 마음을 심었다.  당나라 문장가인 한유(韩愈)의 시에 이런 대목이 있다. "學海無涯苦作舟(학해무애고작주) 배움의바다는 끝이 없으니 고난을 견디며 배를 만들어라.“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심정이 떠오른다. 이 충무공의 거북선 제작과 인고의 기다림으로 23전 23승의 기적을 실행하였다.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배를 상상해 보라! 사람에게 언제든지 꿈이 있다면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다. 나이는 눈 속에 피는 꽃이다. 지혜로운 이들은 어떻게 아침이 오는지를 아는 새의 지혜로 높이 난다.ᆢ

      신의 손길로 키운 구름의 산방(雲林山房)

운림산방은 진도에서도 궁벽한 산골에 자리하고 있다. 담비들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스님들이 오가는 절 하나 뿐인, 물도 그리움도 세상의 소문과 욕망과 갈애가 비껴가는 마을. 뜻이 깊어 살펴온 후손(남농 허건)이 단아하게 가꾸어 놓은 전경이 안온하게 다가온다. 배롱나무꽃은 그런 풍경에 고결한 방점을 내보여주었다. 소너무도 옥순봉도 그 아래 초가 안집보다 누구에게나 가장 먼저 눈이 끌리는 풍경. 들어서면 장자의 꿈을 아는지 잉어떼들이 소요하는 연못.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 대가인 소치小癡 허련許鍊(1809-1892)이 기거하던 곳에서 시작되었다. 남종화는 당나라 시대에 불교의 한 파인 선종禪宗의 남북분파에 착안해 산수화를 출신과 성분과 그리고 화풍에 따라 남북으로 구분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남종문인화라고도 한다. 조선 중기부터 문인들이 여가 활동으로 비직업적으로 수묵과 옅은 담묵채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출에 치중하고, 서정적이며 사의적인 측면을 중시해서 그린 품격 높은 그림을 가리킨다. 특히 중국 명·청 시대에는 남종화가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북종화’가 외형을 위주로 한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였다면 ‘남종화’는 작가의 내적 심경 즉 사물의 형태보다는 그것에 담겨 있는 내용이나 정신이 드러나게 그리는 화법에 중점을 두었던 화풍의 차이가 있다. 완당과 권돈인도 삼절의 높은 예술의 품격을 내보였다.

이런 사조가 조선조에는 17세기 전반기에 유입되어 일부 문인화가들에 의해 소개되다가 1700년경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현제 심사정과 강세황(단원 김홍도의 스승) 등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화단의 주도적인 화풍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간략하면서도 거칠고 강렬한 토착적인 경향을 심화시키면서 점차 형식화되었는데, 19세기 전반기에 추사 김정희는 본래의 문인화적 정신을 회복할 것을 강조했다.

이런 화풍이 근대에 주로 호남지방 화단을 중심으로 전통이 이어졌다. 그런 중심에 서 있는 화가가 소치 허련許鍊(1808-1892)이다. 소치가 만난 스승으로 시서화다詩書畵茶) 선불의 오성(五聖)이라 불리었던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가 있다. 그리고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있다. 평생 여행과 편지로 그림으로 마음을 나눈 초의선사 제자인 소치 허련이 말년에 귀향하여 작품 활동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 운림산방이다. 그래서 운림산방을 남종화의 산실로 일컬어지고 있다.

스승없는 제자없고 제자없는 위대한 스승은 없다

퇴계는 어떻게 조선 성리학의 큰 스승이 되었는가. 공자 또한 뛰어난 수 많은 제자들이 사단(士團)을 이뤄 2500년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반면 화담 서경덕과 율곡은 외롭다. 다산은 저작을 다산(多産)하여 오늘에 이른다.

소치는 스승인 추사 선생으로부터 소치小癡’라는 아호를 내려받았는데, 원나라 때 화단의 대가였던 대치도인大癡道人 황공망黃公望(1269-1354년)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으니 조선의 황공망이 되라고 하여 직접 지어준 것이다. 황공망의 부춘산거도는 중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걸작이다. 황공망도 스님들과 교우가 깊었다.

후에 추사는 소치의 화재를 두고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라고 극찬하였다. 소치의 ‘치癡’는 불가에서 탐진치의 치(癡)라고 할 때의 ‘치’자로서 ‘어리석다, 미치다’라는 말이다. 지능이 대뇌의 질환으로 저하된 것으로 노년에 이르면 나타나는 것으로 병들었다는 의미로 ‘치痴’ 자로 쓰기도 한다. 옛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나 호에 어리석다는 의미의 ‘우愚’ 자나 ‘치癡’ 자를 쓰는 것은 대단한 반어적 의미가 담겨있다. ‘자신이 어리석은 자임을 크게 깨달았으니’ 이는 뒤집어 말하면 자신이 현자임을 암시하는 역설적 의미도 담겨있다는 셈이다. 소치가 젊은 날에 일지암에서 초의선사와 평생 스승인 추사를 만나 받은 서화 공부는 그를 시 서 화에 능한 3절로 거듭났다.

운림산방이 자리 잡은 곳은 첨찰산(尖察山 해발 486m)이 주봉으로 주위의 여러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 안개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떠올리게 한다. ‘운림산방’이란 당호가 바로 그러한 산수화를 연상하게 하는 이름이다.

​ 운림산방은 1대 ‘소치 허련’, 2대 ‘미산米山 허형許灐(1862-1938. 소미산)’, 3대 ‘남농南農 허건許楗(1908-1987) ’으로 이어지며 4대 ‘임전 허문’ 그리고 5대 ‘동원 허은’이 대를 잇고 있다. 한 집안 직계 5대에 이르는 가문의 화가의 길로 매진하고, 화맥이 200여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할 수 있다.

진도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보배스런 섬이란 뜻으로 보배 진珍자를 써서 진도라고 하였다. 그런 진도에 가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글씨(書), 그림(畵), 그리고 노래(民謠)가 그것이다. 노래는 진도아리랑이 있고 강강술래의 고향이기도 하다. 진도는 1년 농사로 3년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경지가 많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배중손장군동상

또한 진도는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제시하는 장이기도 하다. 삼별초의 항몽유적지인 남도산성. 용장산성이 있으며,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고려 현종 8대손 승화후 왕온(王蘊?-1271) 묘지가 온왕 고개길에 남아 있다. 온왕을 따라 나섰던 수많은 군사와 궁녀와 부하들의 슬픈 사연이 깃든 궁녀둠벙(웅덩이 방언)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비가 내리는 밤에는 마치 여인네들의 울음소리가 의신면 만길고개에 들려온다고 한다. 동백나무가 몇 그루 지키고 있는 우항천의 이 비장한 죽음을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진도를 찾아올 때 새로운 아이랜드 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녹진 전망대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의 성지인 울돌목의 물살을 굽어보며 천년 일대사 쾌승의 역사를 되새기면 절로 이마가 숙여진다. 왜 진도가 예향으로 예술은 이렇게 당시의 진도인들이 수많은 죽음을 통해 이 나라를 지켜온 것임을 가르쳐준다. 또한 일몰이 유명한 세방낙조에서 바라보는 진도 바다는 황홀함을 주었다. 한 시인은 이런 광경을 보고 진도 앞 바다는 극락이라고 하였다. 가사도를 비롯한 동백사 전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의재 허백련, 소전 손재형을 비롯한 수 백명의 국전 전국규모 미술대전 특선작가들을 배출한 진도는 의향이고 소리의 고장이다. 남도소리로 기름진 땅 옥주. 진도의 미역과 물김, 톳과 꽃게와 구기자는 신선이 되고픈 이들의 장수식품으로 각광을 받는다.

430년 전의 명량대첩 함성과 토요민속여행 북소리와 진도강강술래가 들린다.(김권일 기자)

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자카리아 무함마드

미친듯 푸른 하늘을 보았다 (이란 시선)

한 뿌리에서 인류는 나왔지(국제연합건물)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은 범인류적 정서를 담고 있는 시를 포함하여, 각기 다른 시대와 국가, 사회정치적 배경, 역사와 문화가 다른 다양한 시를 공부할 수 있었다는 김완 선배와 김호균시인 발제 모임. 나의 시와 비늘은 어느 식탁 위에서 빛나고 있는가. 등푸른 전어의 대가리가 목에 걸려 아리랑 가시소리만 내뱉고 있는 것일까.

세상따위를 버린다는 백석의 편지글을 읽다가 잠이 드는 걸까. 남쪽에는 꿈이 널브러졌다.

저문 강물 따라

치자빛 물살에 몸을 맡기고

가네

눈부신 온어떼들

역류의 몸짓, 처열했던

일생을 고이 잡고

쓸쓸히 강물에 누워

가네

마지막 햇살을 덮고

강물 따라 내려가네

강가에 물싸리나무 이파리 두어개

떨어지네 조용히

길을 만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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