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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反日)사회운동사(3)
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反日)사회운동사(3)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05.0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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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反日)사회운동사(3)

이세영(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2. 3•1운동 이후 반일(反日) 사회운동

3.1 민족항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전국적으로 각 지역에서는 ‘양반의 자제로서 기개를 가진’ 서당 생도들이 조직한 보향단(補鄕團)을 중심으로 청년운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진도에서 보향단은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정경옥(鄭景玉)이 3•1운동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10월에 중퇴하고 귀향하여 읍내 서당에 다니다가 박종협(朴鍾浹, 當 18년), 박석현(朴錫鉉, 당 18년), 김인수(金仁洙, 당 15년) 등의 생도들과 그해 12월 10일에 조직했다. 그들은 1920년 1월 1일을 기해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1919년 12월 30일 오후 7시경부터 독립신문을 모방한 「격문」(「學生父兄諸位」; 「沃州同胞諸位」) 등의 유인물을 제작•등사해서 집집마다 배포했다. 그러나 배포 과정에서 시위 계획은 발각되었고, 정경옥 등 4명과 관계자 7명이 검거되었다. 당시 중국 상하이에서 간행되던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진도의 만세 시위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진도군 읍내에서는 12월(去月) 31일 밤 11시경에 동군(同郡) 보통학교 졸업생 11명이 선언서를 각호(戶)에 배포하며 만세를 부르다. 당지 왜서(倭署)에서는 위(右) 11인 중 박종협(18), 박석현(18), 김인수(15), 정경옥(17) 4씨를 체포하여 1월 10일에 목포 왜(倭) 검사국으로 압송하다.

 

이 진도 보향단의 만세 시위는 만세 시위가 없어져 가던 시기에 독립 만세를 다시 일깨움으로써 1920년 3월에 전국적으로 ‘독립선언 1주년’ 기념 만세 시위가 일어나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것이었다.

1920년 1.1 만세 시위를 계획했던 정경옥 등 4명은 진도군 왜서(倭署)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압송되었고, 1920년 2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1심 재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20년 2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취하됨으로써 최종 형량은 징역 6월로 확정되었다.

이 보향단원 가운데 한 사람인 박종협의 사회 운동 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20년 8월에 목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광주 숭일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동교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퇴학당했다. 귀향 후 1924년 7월경에 진도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총무가 되었다.

2) ‘조선공산당’이 창당되던 1925년 4월 17일에 ‘조선사회운동자동맹발기준비위원회’에 진도를 대표해서 발기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발기준비위원회가 작성한 ‘조선사회운동자동맹발기취지서’의 요지는 ‘현단계의 조선의 사회운동은 사상의 순화를 촉성하고, 조직의 견실을 도모하며, 운동의 진행을 지도하는 전국적 사상 단체로서 조선사회운동자동맹을 조직하고자 하니 전국의 사회운동자는 발기인으로 참여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발기준비위원회는 이 취지서를 경성부 및 지방 각 기관에 우송했다.

3) 1926년 말에 진도신흥청년회를 조직하고 그 대표위원으로 활동했다

4) 1927년 2월 작부취제해방운동(酌婦取縡解放運動) 관계로 광주지검 목포지청에서 출판법 위반 및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감옥살이하다가 1927년 10월에 출소했다.

5) 1928년 3월 진도청년동맹준비위원회에 들어가서 활동했고, 1928년 3월에 진도청년동맹을 창립, 진도청년동맹위원장으로 선임됐다.

6) 진도청년동맹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일본 대판에 있던 박봉석(朴鳳石), 김지배(金地培), 김우성(金又星) 등과 함께 일본 천왕제 국가의 변혁 및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을 목적으로 하는 대판 조선적화당(朝鮮赤化黨)을 조직하다가 1929년 1월 21일 일제히 검거되어 박봉석, 김지배, 김우성 등과 함께 기소되었다. 1929년 10월 23일에 대판 지방법원에서 박봉석은 징역 3년, 박종협은 징역 2년, 김우성과 김지배는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박종협은 1931년 7월 28일에 만기 출소했다.

7) 1931년 9월 1일에 박두재, 박종식과 함께 국제청년일(day)를 앞두고 예비검속되었다가 9월 7일에 훈방되었다.

8) 1934년에 「자각회」와 「진도적색농민조합」의 결성과 관련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그런데 진도의 청년운동•사상운동에서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소진호(蘇鎭浩)였다. 그는 1924년 7월 15일에 결성된 진도소작인회의 간부로서 1925년 1월에 개최된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임시총회에 1924년의 진도 소작쟁의를 보고하여 여론을 환기했고, 소작쟁의의 마지막 단계에서 결성된 진도필연단(珍島必然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소진호의 사회 운동 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는 1925년 4월에 노총분규사건선후전선노농대회발기준비위원회(勞總紛糾事件先後全鮮勞農大會發起準備委員會)에서 전(全) 조선노농대회를 개최하기 위해서 노동 단체들에게 참가를 신청하라는 노농대회발기취지서를 인쇄해서 경성과 각 지방 관계단체에 발송했는데 진도를 대표하는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2) 조선노농총동맹은 1924년 4월 20일 집회 금지를 당한 이래 정식의 집회는 개최할 수 없게 되고, 1925년 4월의 정기 대회도 또한 열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사업방침의 수립은 물론, 만기(滿期)된 중앙집행위원의 개선(改選)도 하지 못하고 전국의 노농총기관을 운전(運轉)하는 데에서도 많은 지장이 있어서 우선 부득이하게 중앙집행위원의 개선을 1925년 10월 5일부터 10월 30일까지 서면으로 투표하여 선출했다. 피투표자(被投票者) 225인 가운데서 서정희(徐廷禧), 마명(馬鳴), 권오설(權五卨) 등 50인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소진호는 선출되지 못했다.

3) 1927년 5월 전국의 923개 가맹단체를 망라하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가 중앙기독청년회관에서 열렸는데 출석자는 282명이었다. 소진호는 진도소작인연합회 대표로 참석했다.

4)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된 한상호 외 43명에 대한 소송기록을 보면, 예심부는 임종택 등 44명 피고인들의 서대문형무소 내 동태에 대해 조회했고, 서대문형무소에서는 간수들의 의견을 적어 「피고인 行狀 심사에 관한 건 회답」으로 보고했다. 본건의 피고는 모두 45명이며 공판은 모두 6번 열렸고, 12월 8일의 4회 공판에서 검사는 최고 징역 5년에서 2년을 구형했다. 소진호는 12월 22일 6회 공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5) 1931년 10월 1일에 광주경찰서 고등계는 광주시 명치정 모 여관에 유숙하고 있던 사회운동자 소진호를 검거했고 20일간 구류(拘留) 즉결처분했다.

6) 1933년 10월 국제반전일(國際反戰日)을 앞두고 광주경찰서에서는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소진호의 친구 모(某)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소진호를 검거하여 약 1개월 동안 취조했고, 11월 5일에 석방했다.

7) 1934~1936년의 「자각회」와 「진도적색농민조합」의 결성과 관련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이상에서 소진호는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사회주의 계열의 합법•비합법 단체에서 10여 년간 활동했다.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1936년 3월에는 「진도적색농민조합」 결성과 관련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 아래 진도의 청년운동을 주도한 이는 박두재(朴斗在)였다. 그는 후술할 진도농민조합 결성 관계자 가운데 곽재필(郭在必)•곽병휘(郭丙輝) 등과 관련해서 ‘박두재의 지도로 좌익서적을 탐독’, 혹은 ‘박두재의 지도로 진도청년동맹에 가입’ 등으로 언급되는 인물이었다.

박두재는 박동인(朴東仁)과 같은 광주학생운동 참가자와 조규선(曺圭先) 등의 도일고학생(渡日苦學生)의 귀향을 계기로 1928년 3월에 진도청년동맹을 결성했다. 이는 진도에서의 민족협동전선론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진도청년동맹의 결성은 진도에서의 내재적 운동 역량의 축적의 성과라기보다는 진도 밖의 외재적 자극에 의한 측면, 즉 광주학생운동 참가자의 귀향과 도일고학생의 귀향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또한 진도청년동맹이 처음부터 지주회와 협조 관계에 있었던 청년회를 완전히 배제하고 결성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조선청년총동맹의 일부 지도부가 일본제국주의와의 직접적 대결을 지양하고 타협적 경향을 띠면서 1930년 11월 전설대회(傳說大會)를 통해 중앙집행위원을 재선출할 때 진도의 박두재가 선출된 사정을 감안한다면 진도청년동맹의 민족협동전선론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 수용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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