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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反日)사회운동사(4)
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反日)사회운동사(4)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06.0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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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한신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자각회」와 「진도적색농민조합」의 결성

 

1930년대에 들어서 진도의 청년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자각회」와 「진도적색농민조합」의 결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도론리와 군내면 세등리, 그리고 진도면 동외리의 청년들이 본격적으로 민족해방운동과 사회혁명운동에 나선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는 오산리의 조규선(曺圭先)이었다.

조규선은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때인 1929년 6월에 가정 사정으로 자퇴했다. 그해 9월 일본으로 건너가 제강회사 직공으로 지내다가 1930년 1월에 귀향하여 진도청년동맹의 교육부장이 되었다. 1930년 12월경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광도시(廣島市)의 관서 자동차학원에 입학하여 두 달 다니고 졸업했다. 그 무렵 동숙(同宿)했던 광도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지동선(池東先) 등의 지도하에 사회과학에 관한 서적을 번역하면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게 되었고, 1931년에는 전협(全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계의 노동운동에 참여했으며, 1932년 1월경에 귀국한 후에는 오산리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았다.

조규선과 곽재필은 1932년 7월 초순에 곽재필의 집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연구와 토의를 넘어서 ‘사유재산제도를 폐기하고 일본제국을 소비에트러시아처럼 무산자 독재국가로 변혁’하기 위한 사회과학연구 써클을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동지의 확보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적극적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1932년 12월 22일 저녁, 조규선과 곽재필은 다시 곽재필의 집에서 써클의 명칭을 ‘각성을 촉구한다’라는 의미로 「자각회」(自覺會)로 부를 것과 그 선언과 규약의 작성, 발회(發會)의 일시와 장소 등을 상세히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선 동지를 확보하는 작업에 나섰다. 먼저 광주학생사건 때 목포상업학교 학생으로 이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하고 옥고를 치른 군내면 송산리 박종식과 접촉했다. 그러나 박종식은 그와 같은 조직을 결성하는 데 반대했다. 이내 그들은 1933년 1월 초순에 박종협과 박동인(朴東仁), 임재옥, 이재석(李在石), 군내면 세등리 곽병휘(郭丙輝) 등을 접촉하고 「자각회」의 목적과 취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동지로 확보했다.

1933년 1월 15일, 조규선•곽재필•박종협•박동인•곽병휘 등은 곽재필의 집에 모여 「자각회」 발회식(發會式)을 가졌다. 이날 발회식에서는 조규선이 작성한 선언과 규약을 검토하고 동의했다. 또한 가입, 제명, 책임부서, 대회, 월례회, 회계 등 12개 조로 이루어진 규약을 승인했다. 회비는 월 30전으로 정했다. 선언은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고 소비에트러시아처럼 신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용기 있는 청년은 「자각회」에 참집(參集)하여 감연히 투쟁’할 것이라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규약에 따라 각 부서와 책임자•부원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책임: 조규선

교양부장: 박동인, 부원: 조규선

조직•재정부장: 곽재필, 부원: 이재석

조사부장: 박종협, 부원: 곽병휘

 

그리고 운동방침으로서 당분간 『프로과학』, 『我等の과학』, 『大衆の벗』, 『新階段』 등과 기타 코프(KOPF: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연맹) 출판물을 구입해서 윤독하고, 매월 1일 및 15일에 회원 모두가 모여서 각자 연구한 사항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토론하며, 각종 기념일의 의의에 대해 강화하고, 회원 확보와 회비 징수하는 것 등을 결정했다. 또한 사회과학 텍스트들은 조규선의 집에 보관하고, 「조선일보」는 교양부장 박동인 집에 비치하며, 주요 기사는 월례회에서 설명하는 것 등을 결정했다.

이러한 운동방침에 따라 회원들은 1933년 2월 1일 곽재필의 집에 모여 제1회 정례회의를 갖고 회비를 징수하고, 동지 확보 및 텍스트 구입 등에 관해 협의했다. 2월 중순에는 다시 진도면 교동리 박종영의 집에서 제2회 정례회를 열어 이재석의 제의로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의 진도지부를 조직하자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3월 중순에는 조규선의 집에서 제3회 정례회를 열어 조규선이 가지고 있던 『비판』(批判)과 회비로 구입한 『신계단』 1933년 2월호를 윤독했다. 이들 잡지는 당시 사회주의계열에서 발간하던 잡지였다. 곽재필은 추가 회원 모집을 위해 군내면 둔전리 이승창(李承昌)과 접촉했으나 가능성이 없어 포기했고, 4월 상순 같은 동리의 곽병관(郭丙寬)과 접촉했으나 그가 침착하지 않은 인물로서 비밀 누설의 우려가 있다고 생각해 포기하고 대신 그에게 독서회를 조직하도록 권유했다. 그는 이후 곽재필의 영향을 받아 『今日の世の中』(中伏濱太郞 著) 등 8권의 좌익서적을 받아 읽으면서 공산주의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각회」는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교재 연구는 지지부진했고, 회비도 규정대로 징수되지 않았으며, 『今の世の中』, 『資本主義のからくり』(山川均 著) 등을 대여하여 의식화 정도를 확인하고 가입시키고자 했으나 한 사람의 회원도 확보하지 못했다. 또한 일본에서 노동자 생활을 한 이재석이 제안했던 동아통항조합 진도지부의 설치 문제는 자금난을 이유로 미결상태로 남겨놓았다.

「자각회」의 활동이 이런 상태에 머물자 1933년 4월 15일경 조규선은 광주로 가서 소진호의 소개를 받아 강영석(姜永錫)을 만나 「자각회」의 진로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그때 강영석은 “현재의 실천 운동에서 조직체를 유지하는 것은 단결로부터 파괴로 빠져 헛되이 희생자를 낼 우려가 있다. 각자가 잠행 활동으로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충고했다. 이에 조규선은 강영석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4월 21일 곽재필의 집에서 그와 만나 「자각회」 회원들이 열의가 없으니 차제에 해산하고 각자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로 협의•결정한 뒤 이를 회원들에게 통고했다. 이로써 「자각회」는 조규선과 곽재필의 뜻에 따라서 해산되었다.

「자각회」가 해산된 뒤 진도에서 제2차로 비밀 결사 「진도적색농민조합」(이하 적농)이 결성된 것은 곽재술(郭在述)의 발의에 따른 것이었다. 곽재술은 1933년 10월 14일에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귀향 직후인 10월 17일에 조규선, 곽재필과 함께 진도공립보통학교 운동회를 보고 돌아오면서 사회운동의 실천적 방법, 조직체 결성의 가부 등에 대해 논의하던 중 조규선으로부터 「자각회」 해산의 경위를 듣고 새로운 농민운동의 조직체를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조규선과 곽재필이 찬성함에 따라 세 사람은 1934년 1월 17일과 2월 6일 두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진도군의 농민운동 지도기관의 결성을 준비했다. 2월 중순의 모임에서는 조규선이 지도기관의 명칭을 ‘진도전위동맹’으로 할 것을 제안했고, 곽재술은 실천적 의미의 「진도적색농민조합」(이하 진도 적농)으로 하자고 제안했는데, 결국은 곽재술의 의견대로 결정되었다. 이후 이들은 동지의 모집, 선언과 행동강령 등의 준비에 착수했다.

한편 진도 적농의 결성은 ‘동지 활동의 의장요구(擬裝要具)로 함은 물론 민중을 계몽하고 지배계급과 지주에 대한 반대 기사를 투고하여 민중의 동정을 얻고 동지 물색의 요구(要具)’로 하기 위한 신문사 지국 개설 문제와 함께 추진되었는데, 1933년 12월 14일 박종협을 지국장으로 하고 곽재술•조규선•박종식이 기자가 되어 중앙일보 진도지국이 개설되었다. 당시 중앙일보는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을 사장으로 맞이하여 ‘국내의 지도적 인물의 총독부 당국과의 타협을 경고하고 그 회유정책에 넘어간 인사들에 대해 날카로운 필주(筆誅)’를 가하여 아연 활기를 띠고 있었다. 진도지국 역시 ‘지배계급과 지주로부터 민중을 분리시키기 위한 폭로전술’을 취재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 곽재술•조규선•곽재필 외에 적농의 멤버로서 박종협•박종춘(朴鍾春)등이 참가했다. 마침내 이들 5인은 1934년 4월 17일, 고군면 고성리 솔밭 가운데서 모임을 갖고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을 전제로 지주계급을 타파하고 농민 생활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적농을 결성하기로 결정했고, 가입•제명•책임부서•대회•예회•세포조직•회계 등 23개 조의 규약을 축조 심의하여 가결했으며, 선언과 행동강령도 가결했다.

규약에 따라 각 부서와 책임자•부원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책 임: 조규선

교양부장: 곽재술 부원: 박종협

조직 및 재정부장: 곽재필 부원: 박종춘

조직 확대를 위해 책임 구역을 분담했다.

 

진도면: 박종협, 조규선

고군면: 곽재술, 박종춘

군내면: 곽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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