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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反日)사회운동사(5)
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反日)사회운동사(5)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08.0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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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회」와 「진도적색농민조합」의 결성
이세영(한신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부서로서 교양부와 조직•재정부만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적농들이 갖추고 있던 선전부나 쟁의부 등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진도 적농이 아직은 실질적인 행동의 단계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우선은 조직과 교양에 중점을 두는 데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진도 적농은 면별 조직 확대 책임자를 두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직 확대의 책임자를 의신면과 임회면에는 두지 않는 반면에 진도면과 진도면 이북 지역에만 두고 있다는 점이다. 진도군 내에서는 진도면을 경계로 그 북쪽의 고군면•군내면은 북촌으로, 남쪽의 의신면•임회면•지산면은 남촌으로 불렸다. 당시 의신면의 면 소재지는 돈지리, 임회면의 그것은 십일시, 지산면의 그것은 인지리였다. 그리고 의신면 칠전리는 밀양 박씨들의 동족마을이었고, 임회면 침계리는 창녕 조씨, 임회면 삼막리는 진주 하씨, 호구리는 창녕 조씨와 진주 하씨, 남동리는 김해 김씨 동족마을이었다. 또 지산면 인천리는 순창 설씨, 상보리는 김해 김씨 등의 동족마을이었다. 적농은 이들 남촌에는 조직을 침투시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는 남촌과 북촌의 생활권이 분리되어 거의 교류가 없었고, 더욱이 남촌 출신으로 적농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 큰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진도 적농은 운동방침으로서 동지 확보에 전념할 것, 서기국 정례회 월 2회(5, 20일 전후) 개최, 개인 활동의 서기국 정례회에의 보고, 코프 출판물 구입과 각자 소지한 텍스트 윤독, 회비 월 30전 납부 등을 규약화했다. 이에 따라 고군면의 곽재술•박종춘은 오산리의 조병하(曺秉河)•조규린(曺圭麟)과 접촉하여 이들을 적농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적농」의 선언은 곽재술이 기초한 것으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객관적 정세

 

(국제 정세) 세계 자본주의 열강의 정치경제적 위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서 명확하다. 가) 군비 확장, 나) 경제 공황 심각화, 다) 관세 방벽 공고화, 라) 파시즘 정치 대두. 이상과 같이 자본주의 국가의 위기는 일층 첨예화되고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은 의연 존속•확대되고 있다.

(각국 정세) 경제적으로 금본위제의 정지, 인플레이션 정책 등은 이미 금융 공황을 야기하고 도시와 농촌은 실업 문제, 농업 공황으로 실로 비참한 지경이 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경제적 빈궁에 빠진 국민으로부터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 적자예산을 편성하면서까지 군비 확장에 몰두하고 있다.

(조선 정세) 전 인구의 8할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데, 소지주•자작농은 해마다 몰락하여 자소작농이 되고 나아가서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소작농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생활 상태는 경제적 파탄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농민의 부조(負租) 및 소작료는 해마다 증대되어 살인적 착취상태에 처해 있다.

(진도 상황) 조선의 한 지방으로 조선의 경제 상황과 동일하지만 특수적 지위에 있음도 적지 않은데, 이는 경제적으로 보면 일반 다른 지방보다 여유가 있음은 명백하지만, 소수의 어업자를 제외하고 거의 전 군민이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고, 그 반수 이상이 소작농인 상태에서 전 수확의 7~8할을 소작료로 착취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2. 주관적 정세

 

(각국 경제) 노동계급과 농민계급은 불안한 생활에서 일탈하고자 맹렬히 투쟁하고 있으니 동맹파업•실업자 데모•소작쟁의의 건수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

(조선 상황) 조선은 농업국으로 수 개의 공업도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농업지방이다. 공업도시 및 농업지방에서는 노농계급의 비애원성非哀怨聲의 결정체인 동맹파업•소작쟁의가 폭발하고 있다. 양적으로 해마다 증가를 보이고 있음은 명백하지만 그 요구가 관철되는 바 거의 없고, 비참하게도 패배와 타협으로 끝나고 있으며,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참혹한 착취를 받게 되는 상황이다.

(진도 상황) 진도는 유사 이래 아직도 일찍이 소작쟁의다운 대중적 궐기는 볼 수 없었다. 다만 십수 년 전에 소작인회라는 타협적 단체가 있었지만 자멸하고 말았다.

 

3. 우리의 운동방침

 

이렇듯 살핀 대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 지주계급이 농민계급의 생활을 빈궁케 하며 나아가서 농민 생활 자체를 위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에 사유재산 제도 부인을 전제로 지주계급을 타파하고 농민 생활을 안정하게 보장하기 위해 진도에 적농을 조직할 것은 선언한다. 우리는 대중적 결의하에 일상 농민 생활에 직접 영향이 있는 제 문제를 본 조합의 행동강령으로 하고 활동할 것을 맹세한다.

 

o 잠정적 행동강령

 

1) 소작료 반감

2) 소작권 이동 무조건 반대

3) 소작계약에 따른 5인제 및 연대보증인제 폐지

4) 고용자 월급제도 실시

5) 소작쟁의단의 설립 자유

6) 전매제도(담배•술) 반대

7) 세금 반감

8) 입도차압(立稻差押) 반대

9) 농지령 실시 철저화

10) 노동자와 농민이 제휴

11) 농민 교양을 위한 농민 야학 설립 자유

12)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의 제휴

13) 조합원 획득

위의 강령 13개 조를 보면 진도 적농은 다른 적농들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의 현실적 문제에 깊이 개입하려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다른 지역에서 등장하던 정치적 성격의 강령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함경남도 정평지역 정평농조재건위원회는 1933년 8월에 채택한 강령에서 ‘제국주의 전쟁 반대’, ‘제국주의 타도’, ‘일선 프롤레타리아 제휴’, ‘중국혁명의 적극적 원조’, ‘소비에트 사수’, ‘조선공산당 재건 촉진’ 등을 넣었다. 그런데 진도 적농의 경우, 이와 같은 정치적 강령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소작농민들의 일상적인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강령과 활동 방향 등이 주요 내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진도 적농은 ‘우리의 운동방침’으로서 ‘사유재산 제도 부인을 전제로 지주계급을 타파하고 농민 생활을 안정하게 보장할 것을 선언’하고 ‘일상 농민 생활에 직접 영향이 있는 제 문제를 본 조합의 행동강령으로 하고 활동할 것’을 결의, 맹세하고 있다.

진도 적농의 실제 활동을 보면, 1934년 5월 이후 7월까지 매월 두 차례의 월례회를 가졌다. 장소는 회원의 집이나 사찰 등지였다. 하지만 5월 20일 회의는 회합자가 적어 유회되었고, 6월 5일 회합도 역시 참석자가 없어 유회되었다. 6월 20일 회의에는 조규선•곽재술•곽재필•조규린 등 4명이 참석하여 회의가 열렸으나, 조규선은 곽재술과 곽재필이 2회 연속 병을 이유로 불참한 데 대해 힐문했고, 두 사람은 이에 대해 사과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규약 10조에 따라 조병하•조규린을 멤버로 한 오산리 지구위원회의 결성을 승인했다. 그러나 7월 5일의 모임에도 곽재술•곽재필은 참석하지 않았고, 조병화•조규린만 참석했다. 당시 박종협은 부친의 중병과 사망으로 인하여 참석하지 못했다.

8월 1일 오산리 조씨 문중의 제각에서 열린 제6회 서기국 정례회에는 박종협 외에 모든 이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곽재술은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교양부장을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적농을 탈퇴하겠다고 나왔다. 이에 조규선과 곽재술 사이에 쟁론이 벌어졌고, 결국 한 사람의 사임은 해체와 같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고 적농의 해체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진도 적농은 결성 4개월 만인 8월 1일에 자진 해산을 결의했다. 이때의 상황을 경찰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昭和 9년 8월 1일 고군면 오산리 조씨문중제각(曺氏門中祭閣)에서 조규선, 곽재필, 조규린, 조병하, 곽재술 5인이 회합하였다. 조규선은 결사가 여의치 못함은 동지의 불열심(不熱心)에 기인하므로 일층 분발해 줄 것을 요망하고 곽재술에게 반전(反戰) 데이의 의의를 설명해 주도록 요구하자, 그때 곽재술이 교양부장의 사임을 표명하였다. 일동은 그의 뜻을 번복하도록 간청하였으나 태도가 완강하자, 조규선이 ‘현재 곽재술을 잃고서…진도에서의 혁명운동은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니 차제에 결사를 해체하고 금후 독자적 입장에서 실천 운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제안을 했다. 이에 전원이 찬동하였다.

 

이같이 진도 적농이 창립 이후 4개월 만에 해체되어버린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창립 당시 명칭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미 그 기미를 안고 있었는데, 조규선은 전위동맹과 같은 지역 전위 정치조직의 노선을 선호했고, 곽재술은 농민조합과 같은 실천 운동을 위주로 하는 결사의 노선을 선호했었다. 그런데 당시 조규선의 노선은 이미 낡은 노선으로 평가되고 있었던 데 비해 아래로부터 농민을 조직하는 적농 노선이 일반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곽재술의 노선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곽재술은 진도에서 실천 운동의 경험이 전혀 없었고, 또 진도의 현실적 여건은 적농의 조직을 확대시킬 만한 운동 역량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적농 창립 이후 4개월이 지난 시점에는 처음 결성을 제의했던 곽재술은 진도의 현실적 여건이 자신의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마침내는 적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적농은 하부 조직이 구축되지 못했고 또 대중 기반이 확대되지 못했기 때문에 적농의 활동은 「자각회」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완도•해남•강진 등에서 결성된 전남운동협의회 산하의 각 군별 적농의 경우, 각 마을에 농민반과 청년반 등을 조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도 적농의 경우에는 ‘반’ 조직 대신에 지구위원회라는 세포조직을 결성하려 했다. 함경남도의 정평농조재건위원회의 경우, 각 마을에 ‘반’을 구성하고 면의 지부위원회와 마을의 ‘반’을 연결하는 조직으로서 지구위원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진도 적농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서 각 마을의 ‘반’ 조직을 그렇게 부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오산리에는 세포조직이 여럿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것들은 진도 적농의 조직 사업이 그만큼 미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국 진도의 적농 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미숙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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