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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반일)사회운동사(7)
일제시기 진도군민의 반일(반일)사회운동사(7)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08.17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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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한신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3) 진도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전술했듯이 1945년 8월 말에 이르러 건국준비위원회는 남한 내 145개 시•군에 건준의 지부를 결성했다. 치안대, 보안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지방의 자치적 조직들은 건준의 지부로 재편되었다. 서울의 건준이 좌익과 우익의 연합체였던 것처럼 지방에서 조직된 건준 역시 성격이 다양했다. 좌익이 주도한 경우, 우익이 주도한 경우, 좌우익이 연합한 경우 등 여러 사례가 보고되었다.

진도에는 해방의 소식이 하루 정도 늦게 전해졌다. 섬이기 때문에 8월 16일 오후에야 목포에서 들어온 구전으로 해방의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해방이 되자 진도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진도지부가 결성되었다. 전남의 다른 군에서는 소수의 명망가들이 미리 모여 조직을 결성한 뒤에 군민대회 등의 군중대회에서 추인을 받는 식이었지만, 진도지부는 8월 18일 오후에 열린 해방 환영 진도군민대회에서 결성되었다. 진도지부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김중현金仲炫

총무부장: 이병영李炳英

학술부장: 박윤규朴胤奎

문교부장: 허백련許百鍊

산업부장: 허혁

치안대장: 허행보

평위원: 정승한, 박종식, 곽재술, 허정돈, 조규선, 문치언, 조욱환, 곽재필, 곽병관,

김요한, 이길성

위원장 김중현은 당시 56세로 식량영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얼마 후 목포로 나가서 활동했다. 이병영은 대구사범을 졸업한 후 영광에서 보통학교 훈도를 지냈고, 3•1운동 시기 학생들을 지도하여 영광 읍내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박운규는 경성고보를 졸업한 후 보통학교 교사와 지산면 면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었다. 허백련은 진도 동외리 출신으로 중앙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광주에서 활동중이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진도 적농을 조직했던 곽재술•조규선•곽재필•곽병관 등과 191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때 목포상업학교에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구속된 박종식이 평위원으로 참여했음을 볼 수 있다.

1945년 9월 20일 전남 건준이 인민위원회(이하 인민위)로 개편되자 진도 건준 지부도 곧 인민위로 개편되었다. 개편을 위한 회의는 진도경찰서에서 열렸는데, 모두 33명의 건준 간부와 유지들이 참석하여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장시간 토의가 계속되었다. 참석자들은 건준을 계속 고수하자는 측과 인민위로 개편하자는 측으로 나뉘었다. 전자는 ‘현 단계에서는 아직 전 인민이 지지하는 밑으로부터의 정부가 들어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인민공화국 역시 너무 급히 만들어져 국가라고 하기에는 시기가 빠르다’고 주장했고, 후자는 ‘정부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며,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일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타협에 실패하자 결국 표결로 결정하기로 했고, 무기명 비밀투표 결과 30대 3으로 다수가 인민위로의 개편에 찬성했다. 결국 진도 건준은 인민위로 개편되었다. 위원장은 김중현이 그대로 맡았고, 다른 부서 간부들도 변경 없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만 반대 입장을 고수한 이길성은 청년부 활동을 그만두고 교육사업에 전념했다고 한다.

진도군 인민위는 박윤규 등 온건파들이 주도함에 따라 1945년 말까지 진도에서는 이렇다 할 정치적 갈등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11월 20일부터 서울의 천도교 강당에서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진도군 인민위 대표로서 박종식•조성환趙聲煥•곽재술 등이 참여한 사실이 확인된다. 또 그해 12월 8일부터 사흘간 같은 장소에서 열린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진도군 대표로 곽재필•이철호李喆鎬가 참석한 사실도 확인된다.

미군 군정중대 제45중대의 일부가 진도에 이주한 것은 그해 11월 하순이었으며, 얼마 후 정승한鄭承漢이 미군정에 의해 군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군수 정승한보다는 인민위 측이 여전히 세력을 갖고 있었고, 정승한도 이를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진도군 인민위는 1946년 2월경까지도 여전히 세력을 갖고 실질적인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광주를 제외한 전남 지방의 다른 군도 대체로 마찬가지였다. 이에 미군정은 1946년 2월 들어 각 군의 인민위와 치안대의 해산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미군정은 진도군의 새 군수로 김치주를 임명하고, 새 경찰서장으로 백영부를 임명했다. 미군은 광주 경찰을 진도에 파견하여 치안을 장악하게 하고 인민위와 치안대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게 했다. 광주 경찰은 인민위 간부들을 검거하여 포고령 위방으로 목포로 송치했고, 고군면 등지에서 청년동맹 간부들을 검거했다. 이때 인민위의 주도자들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섬 밖으로 도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3월 전남 민전이 결성되고 각 군별로 민전 지부가 결성되었는데, 진도군에서도 민전 지부가 결성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본래 진도군의 인민위 내에는 본래부터 온건파들이 많았고, 급진적인 세력은 타 군에 비해서는 취약했다. 따라서 1946년 11월 전남지방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을 때, 진도에서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1946년 들어 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국민회) 진도지부 등 우익단체도 점차 결성되었는데, 독촉국민회의 간부진은 다음과 같다.

 

고문: 조병수曺秉洙, 곽우춘郭宇春

지부장: 김요환金요煥

진도면: 지부장 허담許湛, 박희수朴熺洙, 박병완朴餠浣, 박동석朴銅錫

군내면: 지부장 양성안梁聖安, 박길준朴吉俊, 김북동金北東

고군면: 지부장 박종관朴鍾寬, 한병일韓炳日, 곽채문郭埰文, 조형환曺馨煥, 조맹규曺孟奎,

박종일朴鍾逸

의신면: 지부장 김봉훈金鳳勳, 이남원李南元, 박종학朴鍾學

임회면: 지부장 하석철河錫喆, 이근진李根珍

지산면: 지부장 설재의薛在義, 설치광薛治廣, 김왈현金曰炫, 설지봉薛智峰

조도면: 지부장 한낙현韓絡鉉, 장왕규張旺奎, 이병연李炳連

기타 위원: 제민호諸民濠, 김주환金周煥, 박병지朴秉祉, 한병일韓炳一, 이남률李南律, 조태운趙泰云, 이귀덕李貴德, 김지봉金智峰

상임총무부장: 곽충노郭忠魯

 

고문을 맡은 임회면 용호리 조병수는 일제강점기 도평의원을 역임한 진도의 최대 지주였다. 역시 고문을 맡은 곽우춘은 고군면 신리 출신으로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진도군청 행정계장, 고군면장 등을 지냈던 인물이다.

지부장 김요한은 군내면 분토리 출신으로 읍내에서 구세약방을 경영했으며, 뒤에 진도장로교회 장로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박종관은 고군면 오산리 출신으로 고군면장 등을 역임했다. 곽채문(1918~1950)은 앞서 본 곽두인 면장의 둘째 아들이었다. 박희수는 진도면 송현리 출신으로 의사 시험에 합격하여 진도읍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뒤에 국회의원(자유당)에 당선되었다. 박병완은 진도면 북상리 출신으로 목포상업학교를 나온 뒤 해운업계에 진출, 진도운수주식회사를 운영했다. 곽충노는 군내면 용장리 출신으로 일본흥국상업학교를 다녔다. 곽우춘, 박종관, 하석철, 김일현 등은 일제강점기에 면장을 역임한 인물들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곽두인―곽재술의 대립은 해방 이후에 우익의 독촉국민회에 참여한 곽채문(곽두인의 2자)과 인민위에 참여한 곽재술 간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조씨들 가운데서도 일제강점기 도평의원을 지낸 조병수는 우익으로, 농민조합운동을 지도한 조규선은 좌익으로 나섰다.

독촉국민회에 이어 한국민주당 진도지구당이 창당되었다. 1948년 10월 한민당 진도지구당은 조병수•곽우춘•김요환•제민호•박병완•박휘수 등이 발기인이 되어 출범했다.

우익청년단으로는 대동청년단과 대한청년단 등이 있었다. 대동청년단 진도지부는 1947년에 결성되었으며, 단장은 허훈許勳이었다. 1949년 대동청년단이 해체되고 대한청년단으로 개편되었으며, 단장은 박병완, 부단장은 허휘許暉였으며, 조병선•김명수•한병석•주병의•김기선•박동석 등이 주요 단원이었다.

 

1948년 5•10선거에서는 김병회金秉會(무소속, 의신출신, 보통문과 합격), 곽우춘郭宇春(독촉국민회), 허훈許燻, 박두재朴斗在(무소속, 진도면 북상리, 한민당) 등이 출마, 김병회가 당선되었다. 김병회는 이후 국회에서 소장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1950년 제2대 국회 선거에서는 정당 출신은 한 명도 없이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진도면 남동 출신의 조병문曺秉雯이 당선되었다.

1945년에서 1950년에 이르는 시기에, 앞서 건준과 인민위에 참여했던 세등리의 곽재필과 곽재술은 결국 진도를 떠나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언제 진도를 떠났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46년 전남의 11월 봉기 때 진도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이 시기에는 인민위 세력이 거의 뿌리 뽑힌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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