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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향교와 단군전 
진도향교와 단군전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09.2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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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명륜사상을 주창하며 유교단체가 매년 제사를 올린다.

진도향교는 조선 세종 20년(1437) 처음 지었으나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 뒤 인조 원년(1623)에 다시 세웠고 효종 7년(1656)에 지금 자리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앞쪽에는 교육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제사 공간을 배치하였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7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높은 축대 위에 세웠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이 외에도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작은 규모의 동무·서무가 있고,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서재, 출입문인 내·외삼문 등의 부속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 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진도향교는 진도읍의 중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5㎞정도 떨어진 교동리에 위치한다. 원래 진도향교는 진도창군 당시인 세종 20년(1437)에 처음 성(城) 동쪽에 건립되었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성종 6년(1475)에 옛터였던 오리정 부근으로 옮겨졌다.

그 후 중간연혁은 밝혀지지 않으며 정유재란 때 왜적들에 의해 전부 불타버렸다. 그 후 인조 원년(1623)에 가서야 읍성의 남쪽에 대성전과 동·서재를 지어 위패(位牌)를 봉안하였고 이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뒤에야 현재의 위치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현재 위치로 이건·중수한 연대에 대해서는 약간 착오가 있어 명확하지 않으나 효종 7년(1656)이었다고 추측된다. 숙종 15년(1689)에 명륜당과 동·서재가 개수되고 제기고(祭器庫)·포재소(포宰所)·대문 등이 함께 조성되었다.

약 1,000여 평의 대지위에 돌담으로 둘러져 있는 경내에는 「전학후묘」의 배치기법으로 각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비교적 경사가 심한 지형을 3단으로 정지(整地)한 후 대성전은 2m 높이의 막돌 축대 위에 조영되었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전퇴를 두지 않는 맞배집이다. 

양박공면에는 바람막이 판을 달았고 처마는 전면을 겹처마로, 추면은 홑처마로 되어 있다. 구조는 5량 구조이다. 명륜당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가구는 전·후방 퇴주 사이에 안쪽으로 2개의 고주를 세우고 대량을 걸은 5량형식이다. 동무과 서무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3량구조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인 동재·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교직사로 이용되고 있는 서재와 내,외삼문이 있다.

박재문 단군전숭모회장의 안내를 받았다. 입구서 올라가는 데 계단이 제법 많았다. 금색으로 도색한 통일기원국조단군상이 성전 앞을 지키고 있었다. 홍익문화운동연합이 기증한 것이다.

내문은 없고 외문의 역할을 하는 개천문을 지나니 성전이었다. 문을 열자, 단군영정을 모신 제상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단군의 부인을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로 함께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취재한 단군전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제물도 두 분씩 차리고 술잔도 두 분씩 하고 있어요. 개천절에도 잔을 2잔 올리고 있어요. 위패는 5년 정도 됐어요.”

진도향교

신주는 ‘단군왕후비서갑숭모’라고 씌어 있다. 고려 말의 학자 이승휴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단군은) 비서갑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부루”라고 밝혔다. 박 회장은 최근에 군의 지원으로 제복과 신발, 천막 등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제례비 100만 원으로 개천절을 지냈다고 한다. 이곳에 외지인은 얼마나 방문할까?

“매달 오죠. 향교도 보고 성전도 보고 그래요.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도 바닷길(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 사이에서 조수 간만의 차이로 길이 2.8㎞, 폭 40∼60m로 갈라져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자연현상) 열리면 관광하러 왔다가 들립니다.” 현재의 진도단군전의 역사는 대일항쟁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도 유림들은 1922년 단군전 건립을 결의한다. 3.1 독립운동을 기점으로 민족자존의 단합된 항거의 표상을 단군에서 찾고자 했던 것. 이듬해 봉안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한 씨 성의 비조인 기성만을 봉안했다. 당시 한명이(韓明履, 1886〜1961)씨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20년 진도운수주식회사 이사를 거쳐 진도군참사를 지내고 전라남도 평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단군전 건립을 위해 1924년 동문 안 옛 향교 터인 자신의 땅을 희사했다.

박 회장은 “지금은 폐가가 됐다”라며 “후손들도 뿔뿔이 헤어져서 여기 없다”라고 말했다. 광복되자 단군만을 모시는 성전 건립에 나선다. 1967년 9월 15일 기성회가 결성, 진도향교 서편에 터를 닦아 1978년 6월 3일 단군전을 준공한다. 그해 7월 23일 단군신위와 영정을 봉안했다.

현재도 단군전 안에는 ‘하실’이라는 서명이 있는 단군상 그림이 모셔져 있다. 350년이 넘는 동백나무 배롱나무가 붉은 충렬 지절을 내보이며 경내를 지키고 있다. 역사가 흐르는 민속보배의 섬, 진도는 고려 삼별초와 함께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울돌목이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의 현장 팽목항이 있다. 조상님들은 기적의 승리를 거뒀지만, 후손들은 300여 명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 돌아오면서 단군의 홍익정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느꼈다.(김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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