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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여년 진도 해안을 지켜왔던 남도진성
750여년 진도 해안을 지켜왔던 남도진성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11.1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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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침탈 방어, 삼별초 해상세력 유구열도 전진기지

 

남도석성

진도 남쪽에 위치한 남도진성은 왜적의 방비를 위해 설치하였던 방어기지이다. 삼국시대 때 축성되었는데 고려 때는 삼별초가 이곳을 근거지 삼아 대몽항쟁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지금 남아 있는 성은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1214년부터 1259년에 걸쳐 왜구가 연해지방을 침범하여,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아를 내륙지방으로 옮기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고 조선 세종(19년) 때 이르러 비로서 진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최무선이 활약했던 그 당시 왜구가 얼마나 설쳤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진도가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역에 있는만큼 남도진성은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래서 이곳은 조선시대 수군의 기지였다고 한다.

성을 둘러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 밖 해자에 놓여있는 쌍운교와 단운교이다. 선암사의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단아하고 투박한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1271년 배중손의 삼별초군을 나르던 그 다리다. 이곳을 건너가면 선소가 나온다. 멀리 보물섬 죽도와 돌미역으로 유명한 독거도 물개섬이 한눈에 다가온다.

높이 3m 정도의 석벽이 약 600m 길이로 한 마을 감쌌다. 마을의 동·서·남쪽, 총 세 개의 문이 설치돼 있다. 성을 앞에 두고 주위를 살펴보면 남도 특유의 풍광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났을 일들을 생각하면 맘 편히 즐길 수만은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최근 진도군은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수리를 마쳤다.

서문을 통해 석성 내부가 살짝 보인다. 대략 살펴봐도 백년은 넘어 보이는 고목이 석벽에 몸을 기대면 눈 앞 고목 줄기에는 확성기가 달렸다. 마을소식이 확성기를 통해 성안을 울린다고 한다.

길고양이는 사람을 마주쳐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동행한다. 석성 안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 시간을 역행한 공간감 속에 고려의 아낙들이 보리밭을 건너올 것 같은 환상에 잠시 빠진다.

고려시대 축성된 성벽을 지날 때에는 마치 사극의 한 장면처럼 극적이다. 문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80년대 개발 이전의 마을 모습이 다가온다. 외부에서 본 성벽의 깔끔하고 우람한 모습과 달리 내부는 고요한 시골마을 정경 그대로이다. 다만 조용한 마을이 성안에 숨어 있을 뿐이다. 바로 이곳에서 영화 ‘불의 딸’ 속의 진도씻김굿(김대례) 장면이 촬영되었다.

<김권일기자정리>

 

▲남도진성 속의 남동마을 풍경과 수군만호비

가지런히 놓인 기와지붕, 안락한 마당, 한적한 텃밭 등 기대했던 풍경은 아니다. 슬레이트를 겹겹이 얹어 그 위에 타이어로 무게를 실은 지붕, 시멘트벽에 균열이 생겨 덧댄 흔적 등, 지금까지 이곳에 남아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풍경이다. 또한 여러 시대의 모습이 혼재됐다. 시간의 역류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가장 볼만한 풍경은 진성 바깥에 있는 바닷가 송림이다. 비록 가꾸는 사람이 없어 제멋대로 난 소나무들이었지만 그래서 더 보기 좋기도 한다. 활터로도 사용했을 듯하다. 작은 얻덕을 넘어가면 팽목항의 적막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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