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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세계 유일 5대째 화맥 잇는 ‘남종화의 산실’ 운림산방
【그곳에 가고싶다!】   세계 유일 5대째 화맥 잇는 ‘남종화의 산실’ 운림산방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11.1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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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허련이 말년에 초가집을 짓고 그림을 그렸던 곳. 허건은 다른 사람에게 팔렸던 운림산방을 다시 매입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뒤 국가에 헌납했다.

18세기는 조선시대 문화의 전성기로 알려져 있다. 실학의 성장, 한글 소설과 판소리의 발전 등과 더불어 그림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민화의 유행 등이 바로 떠오르게 한다.

○ 무명 화가에서 조선 최고의 화가

허련은 전남 진도 출신의 무명 화가였다. 19세기에는 권력과 문화가 서울에 집중돼 있었고, 진도는 특히 유배객이 많아 다른 지역보다 더 차별을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진도 출신의 무명 화가가 19세기 문인 산수화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을까?

허련은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진도에서는 마땅한 스승이 없어 체계적인 그림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28세 때에 초의선사의 소개로 윤두서의 후손 윤종민을 만나게 된다. 허련은 윤두서의 그림첩인 ‘공재화첩’을 빌려 초의선사가 사는 해남 대흥사로 가져온다.

잠시, 지암(支菴) 윤이후(1636~1699)는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공재 윤두서의 생부다. 할아버지의 문명(文名)과 아들의 화명(畵名)에 가려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당대에는 남인의 거두 윤선도의 정치적 유산과 해남 윤씨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아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이다. 말년에 해남 죽도에 은거하며 ‘일민가(逸民歌)’라는 수준 높은 가사 작품을 남겼다.

허련은 대흥사에서 공재화첩을 보고 그림 공부에 정진했고, 초의선사는 다시 허련의 그림을 서울에 사는 김정희에게 소개한다. 이 그림을 본 김정희는 허련의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로 올라오게 한다. 이때 허련의 나이 32세였다. 허련은 김정희 및 그의 제자들과 교류하며 시와 서예 수업을 집중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허련은 뛰어난 그림 솜씨에 시와 서예를 겸비하게 되면서 조선 화단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 신관호,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이재. 진도군수 역임), 정약용의 큰아들 정학연, 안동 김씨를 대표하는 김흥근 등과도 친분을 쌓았다. 40세를 전후해서는 여러 차례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려 바쳤다.

허련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추사 김정희다. 허련은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 있는 동안 세 차례 방문해 약 1년간 함께 생활했다. 김정희의 제자로서 김정희가 발전시키지 못한 그림 세계를 완성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추사는 금석문과 서예의 세계에서, 허련은 산수화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허련은 여러 지역을 이동하면서 산수화, 사군자화, 모란화 등을 주로 그렸다. 방랑 생활 중 그림을 그려주고 받은 돈으로 생활했다. 허련은 김정희가 죽은 뒤 고향 진도에 내려와 첨찰산 아래 운림산방이라고 부르는 초가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진도에 내려온 이후에도 끊임없이 서울을 찾아 흥선대원군, 민영익 등을 만났다. 허련은 아마 자신이 출세한 이유가 중앙의 사대부와 연결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호남 산수화의 원조가 되다

허련은 한곳에 머물며 제자를 키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호남지역의 그림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이유는 그의 그림이 자손을 통해 가업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허련의 뒤를 이어 그림을 배우던 맏아들 큰미산 허은이 일찍 죽자 넷째 아들 허형이 그림에 몰두하였다. 허형은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아버지의 그림을 잘 모방하고 전수했다. 특히 모란과 매화 그림은 아버지의 그림을 능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넷째 허건과 다섯째 허림이 가업을 이었다. 또 같은 집안의 허백련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쳤다. 이후 허건은 전남 목포 지역, 허백련은 광주(무등산) 지역에서 그림을 그리고 제자를 양성해 호남을 예술의 본고장으로 만들었다.

남농 허건은 아버지의 반대로 그림 공부를 늦게 시작했다고 한다. 가문의 후광과 자신의 노력을 바탕으로 1930년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무려 14차례 상을 받았다. 보통 허형은 허련의 작품을 모방하고 계승한 인물로, 허건은 가문의 작품세계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현대화의 기법을 도입해 새로운 그림 세계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허건의 그림 경향은 광복 전후가 뚜렷이 구별된다. 광복 전에는 허련과 허형의 그림을 모방하다가 점차 일본 그림의 영향을 받아 채색 표현과 장식적 화면 구성이 두드러진다. 광복 후에는 자연주의적 화풍을 시도하다 현대화의 기법을 도입해 화면 구성을 단순화하는 시기로 넘어갔다. 1950년대 이후에는 가문의 화풍을 중시하면서도 현대적이고 개성 넘치는 그림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가받았다. 허건은 제자를 많이 양성해 호남을 ‘예향’으로 만드는 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1980년대에는 운림산방을 복원해 국가에 헌납했다.

허건에게는 동생 허림이 있었다. 그는 일본 유학 중 사물을 점으로 표현하는 ‘토점화’라는 독창적인 화법을 발전시켜 일본 화단에서 주목을 받았으나 요절하였다. 현재 허림의 아들 허문과 허건의 손자 허진이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허련의 그림은 허형, 허건, 허림, 허백련, 허문, 허진, 허재, 허준 등 가족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허련부터 시작한 ‘운림산방 화맥’은 5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이런 일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운림산방은 국가명승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후손 허문 등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중이다.

 

蘭花蘭葉在山房 난초꽃과 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何處秋風人斷腹 어디에서 부는 가을 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若道風露易嶊折 바람과 서리에 쉽사리 꺾인다면 어찌 오래도록

山房那得長留香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권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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