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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금’의 역사 기록 검토와 해석
‘울금’의 역사 기록 검토와 해석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3.11.1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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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의 검토

 

고려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재상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시 가운데 “겉에는 울금이 덮였네 / 外襲鬱金衣”라는 구절에서 고려시대 중기에 “울금(鬱金)”이 국내에서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삼별초 항쟁 이전의 기록이고 작자인 이규보는 고려시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점에서 기록의 역사성을 반증해 준다.

 고려시대 후기의 학자인 이곡(李穀, 1298∼1351)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에 실린 시 가운데 “울금으로 달인 술 감치면서도 순수하고 / 鬱金煮酒旨且醇”라는 구절에서 고려시대에 음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곡은 학자로 유명한 목은 이색의 부친으로, 목은 이색은 조선왕조 개창기에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1480년 간행, 1530년 신증본)의 군현별 토산(土産)조에 기록이 나오는데 울금(鬱金)은 동복(현 화순 동복 일원), 광양, 곡성, 임실, 순창, 전주 등 주로 전라도 지역의 토산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인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 1420∼1488)의 문집인 <사가시집(四佳詩集)에 ‘울금을 읊다[詠鬱金]“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 우리 선조들이 약용은 물론 관상용과 생활용, 조경용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서거정은 전라도의 중심고을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의 중수기문을 짓기도 한 인연이 있다.

 

울금(鬱金)을 읊다 / 詠鬱金

늦은 봄 황폐한 정원에 울금을 심었으니 / 春晩荒園種鬱金

죽죽 자란 오월엔 산발처럼 더부룩해지고 / 森森五月欲抽簪

가을이 오면 장차 천 길이나 높이 자라서 / 秋來擬見高千丈

비바람 몰아칠 때 섬세한 소리가 나는 걸 보겠지 / 風雨聲中作鳳吟

 조선시대 후기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엮은 농서 겸 가정생활서인 <산림경제> 제4권 치약(治藥)조에서 울금(鬱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울금(鬱金) : 나는 곳에만 난다. 모양이 매미의 복부같이 생긴 것이 좋다. 이것은 매우 향기롭지는 못 하나 그 기운이 가벼워 주기(酒氣)를 높은 데까지 이르게 하므로 신을 내려오게[降神]할 수 있다. 《의학입문》 □월에 뿌리를 캔다. 《속방》 물에 씻어 배건(焙乾)해서 사용한다. 《의학입문》

김희태(문화재전문위원, 진도문화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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