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8:57 (금)
진도의 불교문화유적 - 쌍계사를 중심으로 (1)
진도의 불교문화유적 - 쌍계사를 중심으로 (1)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4.02.08 11: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3 진도문화원 역사문화강좌 9강, 10강] 3회 나누어 싫습니다.

 

 

진도의 불교문화유적

- 쌍계사를 중심으로 

정병삼(숙명여대 명예교수)

 

 정병삼

숙명여대 문과대학 역사문화학과 명예교수

1977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졸업

1991년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문화재청 사적분과 문화재위원 역임.

대한불교조계종 성보보존위원회 위원.

 주요논저

저서 한국불교사 의상화엄사상 연구 일연과 삼국유사 그림으로 보는 불교이야기 나는 오늘 사찰에 간다 등

논문 「의상 화엄사상의 사회적 의의」 「고려대장경의 사상사적 의의」 「8세기 화엄교학과 화엄사찰」 「혜초가 본 인도와 중앙아시아」 「8세기 신라의 불교사상과 문화」 등

 

 

벗 찾아 진도 간다

 

친구 찾아 강남 간다. 지금 내 여정이 바로 그렇다.

 

예전에 진도는 진돗개 진도아리랑 씻김굿 이런 게 떠오르는 고장이었다. 그러다 근래에는 바닷길이 갈라지는 ‘신비의 바닷길’로 온 나라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모았고, 더 최근에는 아직도 그 슬픔을 씻어내지 못한 세월호와 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가장 최근에는 노래꾼 송가인이 진도의 인상을 밝게 이끌고 있어 다행인 듯 싶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진도하면 단연 고려 때의 삼별초, 충무공의 명량대첩 현장인 울돌목이 떠오른다.

울돌목을 내려다보며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에 들어선다. 육지에서 진도에 이르는 길은 삼지원(三枝院)에서 벽파진(碧波津)으로 건너는 길과 우수영에서 녹진(鹿津)으로 건너는 두 길이 있는데 진도대교는 후자를 가로지른다. 바닷물이 지형 때문에 심하게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것이 마치 우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하여 명량(鳴梁)이라 했고 울 명, 돌 량 하여 울돌목이라 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지역 역사에 밝은 이는 본래 ‘울두목’이라 했음을 강조한다.

사실 여러 책에서 이 역사적인 지명의 표기는 일정하지 않다. 지도로는 우리나라 첫손 꼽을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명량항(鳴梁項)이라 표기했다. 그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명량(鳴梁)이라 표기하고 ‘위두목(熨斗項)’이라고도 한다고 해설했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해남 삼지원에서 벽파정에 이르는 데는 수로 30리인데, 물 속에 돌섬이 빽빽하게 가로 걸쳐 있어 징검돌과 같고 징검돌의 위아래는 계단처럼 절단되어 있어 바닷물이 여기에 이르러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리는 것이 폭포를 매우 급하게 늘어뜨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自海南三枝院 至碧波亭 水路三十里 水中石嶼森立 橫亘如梁 而梁之上下 截如階級 海水至此 自東趨西 如垂瀑之甚急) 또 같은 책 해남현에서는 병의 주둥이와 같은데 성난 파도가 급하게 소용돌이쳐 울리는 소리가 용솟음치는 천둥과 같다고 하였다.(有若壺口 怒濤急湍 鳴如沸雷) 비슷한 시기에 전국의 지리 지식을 모아 엮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명양나루(鳴洋渡)라고 표기하고, 벽파진의 상류인데 북쪽 기슭은 해남, 남쪽 기슭은 진도이며 해구가 매우 좁아 물의 기세가 소용돌이치며 부딪혀 흘러 우는 듯하다고 하였다.(在碧波上流 北岸海南 南岸珍島 海口甚狹 水勢湍激而鳴) 또 같은 책의 해남현에서는 우수영과 진도 사이에 있는데, 병의 주둥이와 같고 큰 파도와 거친 물결이 좁은 데서 절구질하듯 만나 소리가 부딪혀 울고, 배가 지날 때 높이 솟아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하였다.(在於右水營珍島之間 有若壺口 洪濤巨浪 遇狹舂撞 聲激而鳴 船過之時 如登高陷下).

벽파정

 

이를 보면 전통시대에는 울돌목보다 울두목이라는 이름을 더 일반적으로 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에 덧붙여 내해와 외해의 갈림목은 사람의 목구멍과 같다고 하여 목구멍에서 소리를 내는 부위인 울대를 따서 울대목이라고도 했다는 말도 귀담아 들어야 할 듯하다. 허나 중요한 것은 울돌목이라 부르든 울두목이라 부르든 그 현장을 직접 체험하며 충무공의 나라를 위한 충정을 되새겨 보는 것이 필요한 일이다.

언제나처럼 갯내음 풍성한 바닷바람이 객을 맞는다. 진도야 초행이 아니라 몇 번 간 길이지만 지금 지우(知友)가 있는 진도는 내게 남다르다. 친구나 나나 이 나라의 역사를 바르게 찾기 위해 평생 동안 책과 씨름하다 이제 좀 쉴 때가 되었다. 다들 어떻게 편안한 생을 만들어 볼까 생각이 많던 차에 이 지우는 고향으로 찾아들었다.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우리 사회가 바르게 움직이도록 무던히도 애를 많이 썼던 친구이기에 귀향의 새 삶은 큰 관심거리였다. 그리고 한두 번 찾아본 친구의 삶은 퍽 아름다웠다. 자신의 생을 시작한 터전에서 역시 바른 길을 외치며 부지런하게 공동체의 활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참 섬이 많은 우리나라다. 요즘 사람들은 어지간한 섬마다 큰 다리가 이어져 있어 섬이 많을 줄 잊고 살지만 삼면이 바다이고 3천 개가 넘는 많은 섬이 있다. 제주도는 섬 같지 않기도 하지만 거제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이 진도다. 진도는 그냥 섬이 아니다. 지금에야 농사가 뒷전인 세상이지만 진도는 토양이 기름져 농사 짓는 것만으로 충분히 살 수 있는 좋은 고을로 여겨 일명 옥주(沃州)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 진도는 서해와 남해가 교차하는 길목에 있는 자리잡아 양 팔을 벌려 두 바다를 안고 있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진도타워

 

삼별초와 용장성

 

큰 섬인 만큼 일찍부터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살아왔을 터이다. 백제 때부터 중앙에서는 진도를 몇 고을로 나누어 보았다. 시기에 따라 중심지는 바뀌었지만 진도는 세 고을로 나뉘어 행정을 펼친 땅이었다. 아무래도 진도가 전국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고려 후반 삼별초(三別抄)가 이곳에 들어와 몽골에 항거하던 때부터였을 것이다. 정치적인 지향이야 어떻든 삼별초는 고려 조정을 짓밟으려는 몽골에 순순히 따를 수 없었고 그래서 택한 길이 바닷길을 따라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해 본격적인 항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배중손(裵仲孫) 장군은 해상 요충인 진도를 점 찍고 들어와 용장성(龍藏城)을 쌓고 항쟁에 돌입했다. 이후로 진도는 전국적으로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고려 무인정권은 진도에 거점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고려는 1170년에 무인들이 문벌정권의 폐단을 견디다 못해 이를 몰아내고, 다시 자신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을 20여 년 벌이다가 최충헌(崔忠獻)이 등장하여 1인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최충헌을 이어 아들인 최이(崔怡)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최이는 권력을 사위인 김약선에게 물려주려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두 서자가 이에 불복할까 염려하여 이들을 권력 다툼의 현장인 개경에 두지 않고 송광사에 보내 머리를 깎고 수행하도록 했다. 만종(萬宗)은 진주 단속사에, 만전(萬全)은 능주 쌍봉사에 머물렀는데, 이들은 무뢰배들을 모아 큰 재산을 모으고 잦은 말썽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원성이 잦았다. 이 만전이 최이를 이어 3대 최씨 집정자가 된 최항(崔沆)이다. 그런데 그 만전이 한동안 진도에 와서 어떤 절에 머물렀다고 한다.(고려사 권 102 열전 金之岱 “崔怡子僧萬全, 住珍島一寺, 其徒橫恣”) 만전이 부리는 무리들은 진도에서도 못된 짓을 일삼았다. 그때 전라도 안찰사(按察使, 고려 때 지방 행정 책임자)였던 김지대(金之岱)가 그중에서도 가장 못된 짓을 일삼던 통지(通知)를 벌줄 만큼 이들의 횡포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 만전 곧 최항을 이은 최씨 4대 집정자 최의(崔竩)는 강화 도성을 헐어버리고 항복하라는 몽골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1258년에 죽은 최의를 이은 집권자는 유경(柳璥)과 김준(金俊)이었고, 임유무(林惟茂)가 이들을 이어 여전히 몽골에 항복을 거부했다. 그러나 왕정복고를 바라는 국왕과 문신들은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화친을 주장했고 결국 1270년에 강화 도성을 허물고 몽골에 항복했다. 그리고 이에 따르지 않는 삼별초는 배중손을 지도자로 뽑아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직체계도 마련했다.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자 1천 척의 배에 재물과 백성을 싣고 강화를 떠나 서해 요지를 공략하고 진도에 이르렀다.

삼별초 일행은 용장산성을 쌓고 행궁을 짓고 관청도 마련하여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임을 주장했다. 이들이 진도에 거점을 마련한 것은 최항 이래 이곳에 기반을 마련해 두었던 연고가 큰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진도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세곡이 개경으로 운송되는 길목에 있는 지리적 요충이었기 때문에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군량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부산이나 전주까지 진격하여 진압군을 물리치고 제주도까지 점령하여 한동안 위세를 떨쳤다.

배중손 동상

1271년 5월 진압군은 세 방향으로 진도를 침공했고 삼별초가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힘을 쏟는 사이에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하여 삼별초 진도 정권은 9개월 만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삼별초는 순식간 무너졌고 배중손은 진도 남도진성에서 전사하였다. 1271년 말에 남은 삼별초 세력은 다시 김통정(金通精) 장군의 지휘하에 탐라(耽羅, 제주)로 거점을 옮겨 계속 항쟁하였다. 탐라의 삼별초는 한동안 전라도 연안과 충청 경기 연안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고 개경 근처까지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거제 제주 등 여러 섬을 지배하고 남방 주민의 호응을 얻어 한때는 크게 세력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김방경(金方慶) 등이 이끄는 여몽 연합군에 의해 1273년 4월 탐라에서 결사 항전하다 장렬하게 분쇄하고 말았다. 이때 이들이 보인 감투정신은 고려 무인의 기개로 널리 기억되었다.

삼별초는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 신의군(神義軍)으로 구성된 군대이다. 고종 때 당시 집정자였던 최이가 개경의 야간 순찰과 수비를 위해 조직한 특별 부대를 야별초(夜別抄)라고 불렀다. 야별초의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여기에 몽골과의 싸움이 벌어져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도망 온 자들로 신의군을 편성했다. 이렇게 하여 삼별초가 되었다. 별초(別抄)는 본래 전쟁 시의 임시적 군대조직이다. 그런데 삼별초는 무신정권기에 빈번한 정변 속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강력한 무력기구로 성장하였다. 삼별초는 개경의 치안 유지와 도성 수비를 맡았고 친위대로서의 임무도 수행했고 몽골 항쟁 때는 전투 부대이기도 했다.

용장산성의 삼별초 항몽탑

삼별초는 대몽 항쟁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적 저항정신의 소유자로서 성장할 수 있었고 국왕과 일부 문신들이 몽골에 항복하고 강화를 선택하자 반개경정부와 대몽항전의 기치를 들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몽골 침략세력의 참담한 전화에 시달리고 있던 전국 군현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 속에 삼별초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삼별초가 몽골에 항거하여 나선 거점이 유독 진도라는 것은 이미 최항이 이곳에 머물며 마련해 둔 터전이 중요한 역할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터만 남은 용장산성 일대에는 용장사라는 절터가 있었다고 알려졌다. 이 용장사터는 최항이 만전이라는 승려로 지냈던 곳일 가능성이 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