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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불교문화유적 - 쌍계사를 중심으로 -2
진도의 불교문화유적 - 쌍계사를 중심으로 -2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4.02.2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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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와 신앙

 

사람들의 삶에 필수적인 것들은 먹을 거 살 거 말고도 많다. 서로 간에 관계를 맺고 생각하고 생각을 나누고 살아야 한다. 아무래도 섬은 뭍보다 자연 여건이 만만치 않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고 그럴 때 사람들은 더 강력한 존재를 떠올리며 믿음을 다진다. 조직화 되기 전부터 우리 마음을 사로잡던 신앙을 전통신앙이나 무교(巫敎)라고 부른다. 현대 고급문화에 비해 낮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저 먼 시대에 무교를 주재하는 무당(巫堂)은 그 사회의 첫손 꼽는 지식인이자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자이며 정치적 지도자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이 나라의 틀을 대규모로 조직화할 때 유교나 불교와 같은 고등 종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후 전통신앙과 불교는 갈등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사이좋게 공존하며 신앙 세계를 이끌었다.

신라말에서 후삼국에 걸친 시기에 진도를 거치는 서해 바다는 뜨거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완도 청해진(淸海鎭)에 본거지를 둔 장보고(張保皐)는 서해 바다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중국과 일본에까지 위력을 떨쳤다. 장보고가 살아 활동한 기간을 짧았지만 장보고 선단(船團)은 중국 동해안 곳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한동안 동아시아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위세를 보였다. 장보고 선단이 진출하여 마련한 곳에서는 신라인들이 신라식으로 불교 신앙을 펼치고 있었다.

바다는 항상 위험을 안고 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불교 신앙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특히 지금 당장 나에게 닥친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관음(觀音)신앙은 바닷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믿음이었다. 그래서 관음은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간절히 부르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바닷가 아름다운 바위에 걸터앉아 자신의 몸을 직접 드러내는 진신(眞身) 신앙이 더욱 환영받았다. 신라 때는 동해안 낙산(洛山)이 그 자리였고 지금은 서해의 강화 보문사나 남해 금산 보리암도 관음성지로 함께 각광받고 있다.

장보고 선단 이후에도 진도 근해는 불교계의 요점이었다. 신라 말에 선종이 크게 일어나 수많은 신라 승려들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선불교(禪佛敎)를 널리 폈다. 그들이 오고가는 통로가 대부분 진도 근해에 몰려 있다. 당시 공식적인 대당(對唐) 항로는 지금의 화성인 남양만 당항성(黨項城)이 항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나주 회진(會津)이 대부분의 유학승들이 귀국하던 통로였고, 일부는 지금의 강진 관내인 탐진(耽津)으로 배를 대기도 했다. 진도는 이 두 길을 아우르는 지점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은 그런 자취를 확인할 자료 발굴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진도에서 찾을 수 있는 불교의 자취는 신라말부터라고 한다. 몇 군데 산재해 있는 유적이 이를 말해 준다. 국립광주박물관의 진도 출토 통일신라 불상 입상도 그중의 하나이다. 다만 소형 불상은 다른 지역에서 신앙의 대상이었다가 진도로 흘러들어왔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확실한 자료는 되지 못한다. 그보다 일부 절터 유적에서 신라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니 앞으로 확실한 결과를 기대해 볼 일이다. 보다 확실한 자취는 고려 후반부터 살펴볼 수밖에 없다. 당시 고려는 불교가 사회 깊숙히 뿌리 내려 있었다. 고려 조정이 몽골과 싸우며 강화에 수도를 옮겼던 시대의 불교 유적이 강화에 많은 수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곧 알 수 있다. 삼별초가 진도에 터전을 마련했을 때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담보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 불교는 필수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그 확실한 유적은 아직 알 수 없어 용장성 안에 자취가 남은 용장사 같은 곳을 통해 이를 짐작할 뿐이다.

군내면의 해원사(海院寺)지와 한산사(寒山寺)지, 향동리사지, 의신면의 칠전리사지, 지산면의 동백사(冬柏寺)지, 임회면의 죽림사(竹林寺)지, 상만리사지, 봉성암(鳳城庵)지 등이 대체로 그간의 사지(寺址) 조사 자료에서 입증되는 진도의 고려시대 절터들이다. 이로 보면 고려시대에는 진도 전역에 걸쳐 곳곳에 절이 자리잡고 사람들의 신앙을 이끌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골산 마애불

금골산 마애불

 진도의 불교유적으로 주목되는 것이 금골산(金骨山) 마애불이다. 금골산 마애불은 해발 198미터인 금골산 정상의 아래쪽 암벽에 새긴 불상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원하는 부처를 법당 안만이 아니라 자연에도 만들고 싶어 했다. 신라 사람들은 도성 가까운 남산에 수천 개의 불상과 불탑을 만들어 그곳이 부처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비단 경주 남산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자주 가는 곳, 그래서 영험이 서려 있다고 추앙하던 큰바위 곳곳에 부처를 새겨넣었다. 전국에 남아 있는 수백 개의 마애불이 그런 존재들이다.

금골산 마애불은 정상 언저리에 있는 상굴(上窟) 동굴(東窟) 서굴(西窟) 3개의 동굴 중 동굴에 있다. 10미터 높이에 너비 20미터가 넘는 바위가 움푹 들어가 자연스럽게 덮개와 같은 형상을 이룬 자리에 불상을 새긴 것이다. 3.8미터 크기의 이 마애불은 명상에 잠긴 듯한 자세의 좌상으로 조각기법이 세련된 면모가 많으나 세부적인 상호와 옷자락 등의 표현은 거친 부분도 적지 않고 긴장감이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이 마애불상은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하여 퇴화한 조선시대 제작으로 본다. 특히 1498년에 진도에 유배왔던 문인 이주(李冑)는 금골산록(金骨山錄)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주는 이 글에서 마애불이 옛 진도군수 유호지(柳好池)가 조성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유호지는 1469∼1471년 사이에 진도군수를 지냈다. 이주가 금골산을 찾은 때로부터 불과 30여 년 전이다. 더구나 이주는 나라의 기록을 책임지는 사관(史官) 출신이었으므로 그 기록의 신빙성은 더했고, 이에 따라 이 마애불은 15세기 후반이라는 절대 조성연대를 가진 불상으로서 일찍부터 주목받는 문화재였다.

이주는 금골산록에서 마애불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금골산은 진도 읍내서 서쪽으로 20리 지점에 있고, 중봉이 가장 높고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바라보면 옥부용(玉芙蓉)과 같다. 서북은 바다에 닿고, 지맥이 구물거리며 남으로 달려 2마장쯤 가서 간점(艮岾)이 되고, 또 동으로 2마장쯤 가서 용장산이 되어 벽파도에 이르러 그친다. 산의 주위는 모두 30여 리인데, 아래에 해원사(海院寺)라는 큰 절터가 있다. 9층석탑(실제는 5층석탑)이 있고 탑의 서쪽에 황폐한 우물이 있으며, 그 위에 삼굴(三窟)이 있다. 맨 밑에 있는 것은 서굴로서 굴이 산의 서쪽에 있는데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근자에 일행(一行)이란 중이 향나무로 16나한 소상을 만들어 굴에 안치하였다. 굴의 옆에 별도로 고찰 예닐곱 칸이 있어 중들이 거처하고 있다. 맨 위의 것이 상굴인데, 굴이 중봉 절정의 동쪽에 있어 기울어진 비탈과 동떨어진 벼랑이 몇 천 길인지 알 수 없다. 상굴에서 북쪽 바위로 나가서 동쪽 곧장 8,9보 쯤 내려가면 동굴이 나오는데, 앞칸의 건물은 모두 비바람에 퇴락했다. 굴 북쪽 비탈을 깎아서 미륵불을 만들었는데, 옛날 군수 유호지가 만든 것이다.

이렇게 기록을 남긴 이주(李冑, ?~1504)는 조선 전기 사림정치를 이끈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과 봉교 등을 지낸 문사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1495년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불교의 재(齋)를 지내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했던 철저한 유교 정신의 구현자였다. 사직한 지 3년이 지나 그는 스승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루되어 국문을 받고 진도에 귀양온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희생자였다. 그는 6년 후 제주로 유배지를 옮겨 그 해에 사사(賜死)되었다. 불교의 재 지내는 것이 불가하다고 상소를 올렸던 그가 진도에 와서는 금골산의 절을 방문하고 그 상세한 기록을 남겼으며, 또 때로는 동자에게 술병 들리우고 금골산 상굴에 들러 언옹(彦顒) 지순(知純) 등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사면령에도 불구하고 영어의 몸이 풀리지 않자 이내 마음을 돌렸다. 금골산 정상에 있는 상굴에 가서 스님들과 지내기로 한 것이다. 낙엽이 문을 메우고 먼지와 모래가 방에 가득하며 산바람이 부딪히고 바다 안개가 스며들어 바다 독기가 다북하게 쌓여 살 수 없는 방을 먼지를 쓸어내고 벽을 바르고 나무를 베어 불을 때고 문을 열어 공기를 통하게 하여 한동안을 지냈다. 한낮에 밥 한 사발 먹고 아침저녁으로 차 한 잔씩 마시며 닭이 우는 소리를 들어 새벽인 줄 알고 앞바다의 밀물을 살펴 때를 짐작하며, 자고 일어나는 일을 마음대로 하고 동작을 뜻대로 하는 스님들과의 마음 편한 시절을 무려 23일간이나 지냈다. 그런데 상굴이 너무 험하여 당시 군수 이세진(李世珍)도 술을 들고 와서 말리고, 특히 친구들이 몸을 상하면 불효(不孝)임을 역설하자 하는 수 없이 스님들과 헤어져 상굴에서 내려왔다. 그때 스님들이 건네준 자료를 토대로 금골산록이라는 글을 지어 남긴 것이다. 그가 예언한 대로 두 스님과 귀양살이하던 늙은 유학자가 함께 굴에서 거처한 것은 바로 그날로부터 옛일이 되어 남았다.

 

마애불 다시 보기

 그런데 나그네의 마음에는 딴 생각이 깃든다. 이주도 언관 시절에 불교 행사 폐지를 강력 상소했듯이 이때는 사림들의 유교 도덕정치 구현이 지상 과제이던 때였다. 군수 유호지는 마을의 안녕을 위해 마애미륵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유호지의 집안 족보에도 그렇게 전해온다. 유호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진도군수 3년을 무사히 마치고 예절과 의식을 담당하는 관청인 통례원(通禮院)의 종6품 인의(引儀)가 되어 서울로 돌아갔다. 그런데 도덕정치를 펴려고 진도에 온 유학자 군수가 공공연하게 거대한 재정을 들여 마애불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좀더 면밀한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이주의 진도군수 재직 시기는 예종에서 성종 초반이다. 아직 세조 때의 숭불 분위기가 남아 있어 오랜 장마에 원각사와 흥천사에서 기청(祈晴)불사를 지내고 예종이 위급하게 되자 내불당에서 승지들에게 기도를 올리기도 했던 때다. 동시에 사찰을 새로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사간원에서는 내불당 폐지를 상소하기도 했다. 성종은 하루 세 차례나 경연 주강 석강을 받으며 사림들과 함께 유학을 체화(體化)하고자 했다. 성종이 선왕을 위해 불경을 완비하려 하자 사관들은 일제히 그 불가함을 극력 상소한 것이 이 시기 분위기를 대변한다.

이 시기 전라도의 정정(政情)은 편안하지 않았다. 장흥 지방에서 장영기(張永奇)란 도적이 창궐하여 이를 잡기 위해 서울에서 지휘자가 파견되는 북새통을 떨었다. 전라 수군절도사는 물자를 비축한다는 핑계로 선군(船軍)을 징발해서 며칠 동안 사냥한 것이 들통나 파직당했다. 1471년에는 전라도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수령 15명을 곤장을 쳐서 징벌할 정도였는데, 진도군수는 이에 들어있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지방민 보살피는데 상당히 애를 썼던 모양이다. 이해에 조정에서는 전라도의 공납도 면제하고 호구조사도 미룰 정도로 백성들의 피해는 컸다.

이주는 금골산록에서 불가(佛家)에서는 이 산이 영험이 많아서 해마다 방광(放光)하고 유행병이나 가뭄 같은 재앙에 기도를 드리면 반드시 효과가 나타났는데, 미륵불을 만들어 놓은 뒤부터는 산이 다시 방광한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산의 영험을 미륵이 대신 베풀어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튼 금골산 마애불은 오른손이 엄지와 약지를 맞댄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을 취하고 있어 흔히 아미타불이라 한다. 그런데 이주가 금골산록에서 말한 것처럼 미륵불의 전법륜인과도 흡사한 모양이어서 굳이 미륵불이 아니라고 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미륵불이 산의 정기를 빨아들여 대신 영험을 내린다고 생각하고 미륵불에 치성을 올렸을 것이다.

이 마애불은 특히 가슴 가운데 사각형 홈이 마련된 것이 이채롭다. 불상을 만들 때 그 사연을 남기고자 넣는 내용물인 복장(腹藏)을 넣은 자리일 것이다. 금골산에는 이 가슴 구멍이 보물단지였다. 이곳에는 노승과 동자 둘이서 수행에 몰두하고 살았다. 불상의 가슴 구멍에서는 날마다 꼭 두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소식도 없이 여러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스님들은 손님들에게 공양을 대접하려고 구멍을 쑤셔서 쌀을 더 얻고자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더 이상 쌀은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또 어떤 전승에는 마애불이 아니라 상굴에서 쌀이 나온다고도 했다. 욕심부리지 말고 청빈하게 수행에 전념하라는 이런 설화는 다른 절에서도 종종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금골산 마애불과 똑같이 가슴에 홈을 가지고 있는 불상이 또 있다. 불상 크기가 16미터나 되는 고창 선운사 도솔암의 거대한 마애불이다. 도솔암 불상은 그 감실(龕室)에 비결(祕訣)을 숨겨 두었고 이를 꺼내는 날 새 세상이 열린다는 참언이 전해진 것으로 이름난 불상이었다. 실제로 동학이 일어났을 때 이 지역 접주 손화중(孫和中)이 불상에서 비결을 꺼내 동학도들을 이끌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알려지기도 했다.

도솔암 마애불이 주목되는 것은 금골산 마애불 기슭에 해원사(海院寺)터가 있고 그곳에 지금도 오층석탑이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탑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529호인데, 기단부와 높은 1층탑신이 다른 탑과 두드러지게 차이나는 특징이다. 단층 기단은 4장의 판석으로 면석을 짜고 각 면 중앙에 탱주를 세웠으며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했다. 탑신부의 1층 탑신은 기형적으로 길고 2층 탑신석부터 5층까지는 1층 탑신석의 절반가량으로 줄어든다. 옥개석은 처마가 사선을 이루고 있고 낙수면은 약간 경사가 져 있으며 전각의 반전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석탑은 고려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형식이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보물 제167호)이나 나주 송제리 오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78호) 등과 비슷한 백제계 석탑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해원사터의 고려말 오층탑이 백제계라면 금골산 마애불도 같은 시기에 백제 영역인 도솔암 마애불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주가 금골산록에서 유호지가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한 것은 마애불 근처에 있는 암자를 중수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주가 이런 사실을 직접 자료를 찾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지냈던 금골산 상굴 스님들이 건네준 자료를 보고 쓴 것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나그네의 쓸데 없는 상념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찌됐건 이주가 그 즈음에 일행이 서굴에 16나한상을 조성했다고 한 것을 보면, 이때 진도 불교는 이 금골산을 중심으로 상당히 활발한 신앙을 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주는 금골산 유숙에 즈음하여 「금골산 가는 길에(金骨途中)」, 「상굴에 이르러(到上窟)」, 「동굴(東窟)」, 「스님께 드림(贈僧)」 등의 시를 지었고, 군수의 사냥길에도 동향한 듯 「군수가 짐승 사냥하는 것을 보고(觀郡伯獵獸)」라는 긴 시를 짓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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